당구이야기

당구야사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7. 10:08

당구야사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3:10:35

[ 1] 재일동포 윤춘식 아메리카 세리묘기

한국인으로서 일본 당구계에 우뚝선 윤춘식은 이후에도 수없이 도전해오는 기라성같은 고수들에게 한번도 져 본적이 없이 일본의명인타이틀을 지켰다. 그는 5060년내 매년 고국을 방문해 당구의 꽃으로 불리는 예술구를 맨처음 국내에 소개했을 뿐아니라 실로 일본 당구계를 석권하고 있는 명인다운 일화를 남겼다.

20여년전 한일친선당구대회차내한한 그가 명동의어느 당구장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제나 지금이나 당구장에는 당대의 최고점자가 방문하는 것이 그 업소 최대의 영광이었다. 공을 치고있던 동호인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단한번이라도 코치를 받고 싶은 마음이 모두의 가슴에 간절했다.

이윽고 한 고점자가 이를 정중히 제의했다. "선생님,우리가 당구치는 것을 보시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시든지 직접 코치를 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윤춘식의 반응은 약간 엉뚱한데가 있었다. ",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두 두사람씩 당구대에 붙어 게임을 하십시오. 본인은 경기가 끝난 다음에야 지도를 하겠습니다." 1시간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9대의 당구대마다 23판제로 경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카운터 전면에 의자를 갖다놓고 우리들의 공 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윤춘식은 모두를 조용히 불러모았다

놀랍게도 그는 그때부터 복기(復記)에 들어갔다. 매경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도 1번 당구대부터 9번까지 게임과정을 정확히 기억해 모든 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래 만들었다. 그때의 그분은 두렵다는 느낌뿐이었다. 바둑의 달인들이 한판을 끝내고 복기하는 것은 수없이 봐왔지만 당구를 순서대로 복기한다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그것도 9대 당구대에서 18명이 쳤는데 . 윤춘식은 이렇게 무서울정도로 예리한 두뇌를 가진데다 재능위에 부단한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평생 '()'라는 것을 모르는 달인으로 당구인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 2] 일제시대 달인들

< 가수남인수 1천점 ."최고수"칭호 영화인 나운규 김승호씨등도 즐겨 >

당구장이 전국에 몇 개 안되던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당구가 최고의 고급 사교오락이었다. 일본인 귀족이나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던 전문학교 학생쯤은 되야 큐를 잡을 수 있었고 학생들은 망토를 입은 어색한 자세로 당구를 즐겼으며 무수한 저명 인사들이 한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 가운데 정치인으로는 해방후 이승만대통령의 강력한 정적이었다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억울하게 처형된 조봉암 박사가 가장 눈에 띄는 애호가였다. 일본 중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수학할 당시 당구를 배운 그는 서울 시내의 한 당구장을 아지트로 삼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당구를 좋아했다.

일제하의 연예인중에는 영화 아리랑을 감독, 주연했던 춘사 나은규와 영화'만추'의 주연배우 김승호, '애수의 소야곡'등을 남긴 가수 남인수등이 상당한 솜씨를 자랑했던 당대 최고 수준의 당구인이었다. 특히 애잔한 미성으로 여인들의 가슴을 울렸던 남인수는 요즘 4구 점수로 치면 1천점 정도를 때리는 최고점자로 당구계에 명성을 드날렸다. 당구를 너무 즐긴 나머지 지방 공연때마다 펑크를 내기 일쑤였다는 그를 필자는 해방후 충무대 연각자리에 있었던 태양당구장에서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 제4] 해방뒤 당구장 풍경

앞서도 말했지만 구한말 당구가 처음 이땅에 들어왔을 때는 순종이 즐기는등 궁중스포츠로 시작됐으나 해방뒤에는 한량들의 레저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면 일제 강점하에서는 어떠했는가.

그때는 보성 전문이나 연희 전문학생, 또는 일본 유학생들이 일제의 억압에 항거하는 기분으로 큐를 들었다. 물론 소위 인텔리라는 자긍심으로 즐긴 면이 없지 않았지만 저항 의식도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그때를 산 당구인들은 후세에 전했다.

이처럼 유전을 거듭한 당구가 해방 뒤 ' 당구를 못치면 한량축에 끼지 못한다 ' 는 우습지도 않은 풍조로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당구장을 드나들게 됐다. 이때 등장한 것이 삼화당구장이다. 명동을 거점으로해서 당구붐이 일면서 3인의 30대초반 여류 당구인들이 충무로 입구(전혜성카바레앞)에 공동투자해 당구장을 개업했던 것이다. 미모의 세여인이 모였다해서 꽃에 비유해 '삼화'당구장 이란 이름을 내걸었다.

출발부터가 이색적인데다 150200점을 치던 30대초반의 세여인중 Y씨만이 유부녀였고 K,L여인은 과부여서 장안의 많은 한량들이 군침을 흘리며 모여 들었다. 당구대 7대를 들여놓았던 이당구장은 항상 장내거리를 따로해야 될 정도로 사람이 몰려들다보니 그 이웃에 있던 당구장들이 영업이 될리 없어 속속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삼화하면 5060년대에 당구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던 곳이다. 그러나 주인여자들이 워낙 콧대가 센데다 출입하는 사람들이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명함도 못내밀고 머쓱해져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특히 삼화에는 유명연예인들의 출입이 잦았다. 대중가요 작곡가 전오승씨 색소폰연주가 이형재씨 아코디온연주가 김기송씨등이 당시의 단골 멤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세여인중 L씨가 이익금 분배를 둘러싸고 의견충돌을 일으킨 끝에 삼화에서 떨어져 나가고 남은 두 여인이 당구장을 계속 운영했다. 이에따라 업소명칭도 이화로 바꾸어 70년대 말까지 변함없이 명동 당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 당구 역사

당구가 유럽에서 아시아권으로 전파된 것은 500여년이 흐른 뒤다.

1850년에 네델란드인을 통해 일본 황실에 보급된 것이 아시아 최초였고, 우리 나라는 1910년 순종왕때 창덕궁에 일본인을 통해서 당구대 2대가 설치되면서 한국 당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국내 최초의 당구 동호인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을 꼽을 수 있다.

남산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 18면에는 화려한 궁중 당구대 2대의 큐장 및 큐 등을 담은 빛바랜 사진이 있다. 86면에는 화려한 인정전(仁政傳) 동행각(東行閣)에서 대신들과 함께 당구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양의 당구는 상아공이라 불렸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옥돌(玉突)이라 불렸고 비운의 젊은 왕은 푸른 잔디밭을 연상케 하는 녹색 필드안에서 이루어지는 적()과 백()의 조화에 푹 빠졌다고 한다.

왕이 옥돌대에 납실 때마다 사모관대를 한 대신들이 줄줄이 따랐으며 틈틈이 옥돌을 즐겼고 그의 당구실력은 요즘 당구점으로 치면 300~400점에 고수준급 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얇은 동호인층 중 가히 최고 실력을 자랑했던 임금은 요즘 마세이(찍어치기) 처리를 할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4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모아치기까지 어느 정도 구사했다고 하니 나라를 잃은 왕조의 설움을 당구로 달랬다고 한다.

순종의 시합 대상자는 대사들보다는 주로 일본인 고관들이다. 특히, 당시 경찰 책임자였던 "야노"가 임금의 호적수여서 막상막하의 접전을 벌이곤 했는데 임금은 항상 승부와 관계없이 고고한 품위를 유지했다고 한다.

세계 당구 역사

현재 즐기고 있는 우리의 스포츠나 놀이 등이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흥미를 가져다준다. 요즘에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의 대부분의 옛날 고대사람의 삶속에서 즐겼던 여러 가지 놀이에서 비롯되었다. 미스테리로 싸여있는 여러 고대의 유산들(무덤의 벽화, 상형문자등)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구의 기원은 확실치는 않으나 고대 이집트 벽화(기원전 1500년경;AD1500)에 나오는 Bat Ball을 갖고 하는 놀이에서 그 기원을 조심스럽게 찾을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익스피어가 쓴(1607)에 쓴 `안토니와 크레오파트라'`당구장(Billard) 가실까요?'라는 문장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 사실은 세익스피어당시에는 일반인들도 'Billard'라는 것을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보면 요즘의 우리나라의 당구에 대한 인식과는 사뭇 다른 개념을 접하게 된다. 즉 옛날의 당구를 즐기는 층은 주로 왕이나 귀족, 대통령, 신사들, 부유한 여성들, 능력있는 사업가들등이 주를 이루었다.예나 지금이나 스포츠를 포함한 레크리에이션(recreation)과 같은 운동은 상류층의 전유물인 것같다. 중하류층은 당장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바삐 움직이는 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당구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영국식 기원설, 프랑스식 기원설, 스페인식 기원설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인 당구게임의 시작은 크로켓 또는 바치(둘다 현대의 크리켓과 같은 형태)라는 옥외경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기는 13세기경 유럽에서 아주 인기있는 오락이었고 이것이 14세기경에 현대의 당구 테이블의 형태로 되어 옥내형태로 끌어 들였다.

그 테이블은 쿠션과, 돌로 만든 베트가 있었으며 녹색의 천으로 덮여 있었다.

이 것이 영국식 기원설이다.

또는 십자군 전쟁시 동방에서 유럽으로 가져 오게 되었고 스페인 등에서 고안 되었다는 스페인 기원설이 있으나 자료가 미미하다.

프랑스 기원설은 1571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왕실의 예술가였던 드비니가 고안하고 간단한 규칙을 만들었다는데 기초를 둔다.

포켓 게임을 위주로 발전해 나갔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포켓을 이용하지 않는 전혀 다른 게임이 연구되어 퍼져 나갔는데, 바로 이것이 4구 및 3구와 같은 캐럼 게임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유럽에서는 같은 형식의 실내 경기로 발전해서 일정한 형태를 가진 틀이있는 테이블 위에서 공과공을 부딪쳐서 득점을 겨루는 게임으로 발달해 왔다.

영국에서는 상아 공을 2개 사용하여 당구대에 Ironarch(아이언 아치)라고 하는아치 모양의 관문을 세워서 이 아치를 빠져 나가게 하는 형식의 게임이었다.

18세기가 되자 테이블 위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공을 떨어뜨려서 득점을 겨루는 형태로 개량되어 갔지만 이것은 아이언아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초는 테이블 중앙에 구멍을 뚫거나 4구석에 구멍을 뚫었지만 테이블의 모양이 장방형으로 정해지고 나서는 테이블 4구석과 긴 쿠션의 중앙에 각 2개 총 6개의 구멍이 뚫리고 이 구멍에 공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포케 게임의 원형이다.

1770년대에는 2개의 공으로 하고 있었던 기존의 방식에 붉은 제3의 공을 첨가해 3개의 공을 사용한 게임이 고안되었고, 수구를 다른 2개의 공에 맞혀서 득점을 겨루는 캐럼 게임으로 변천되었다.

19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영국의 '잭 카'가 큐 끝에 백묵 가루를 칠하는 것을 생각해 냄으로서 큐 끝의 미끄러짐을 막고 공에 횡회전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공에 비틈을 주는 것을 '잉글리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영국에서 고안된 타구법 이라는 데서 온 것이다.

그 후 프랑스의 '망고'가 탭의 원형인 가죽 조각을 큐 끝에 부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공의 회전력은 더욱 더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해, 밀어치기, 끌어치기, 비틈등의 놀라운 기술이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