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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장지문 위의 흑백사진들 / 길위의 인문학 - 시와미술 아카이브 본문

일상이야기

장지문 위의 흑백사진들 / 길위의 인문학 - 시와미술 아카이브

김현관- 그루터기 2025. 8. 22. 02:28

장지문 위의 흑백사진들 
<길위의 인문학 - 시와미술 아카이브>

수원 우만동, 창룡문 밖. 세계문화유산이 된 화성의 동문을 지나면 조용한 과수원과 몇 채 의 집들이 있는 시골 마을이 나온다. 바로 그곳, 우만동 318번지. 새벽과 아침이 맞닿은 시간, 조그만 집에서 태어났다.

수원 동문 앞에서 찍힌 가족사진 속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연무대와 화홍문을 놀이터 삼던 어린 시절, 모자란 젖을 이웃의 품에서 대신 받으며 잠들던 기억은 어느새 사진의 여백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외할아버지의 환갑날이다. 외가 앞마당에 기생들이 춤추며 노래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잔치에 흥을 돋우고 가족들은 기념사진을 찍는다 무심한 듯 다정했던 그들의 손길이 오늘도 가슴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운다.

제기동, 세발자전거 위 환히 웃던 어린 날. 인수 아저씨 무릎에서 찍힌 그 한 장의 사진은, 되돌릴 수 없는 순수의 시절을 영원히 박제한 채, 내 가슴속 깊은 그리움의 초상이 되었다.

흑백사진 속, 국민학교 졸업식 날의 나는 졸업장을 들고 당당히 서 있다. 10,000명이 넘던 전농국민학교. 그 무수한 얼굴 중 지금 떠오르는 친구는 상구와 민규. 그리고 이름만 남은 몇몇의 기억들뿐이다. 그래도 소풍만큼은 창경궁, 용주사, 광릉 등 제대로 다녔다. 어머니 혹은 할머니와 나눈 김밥과 찐계란, 사이다 한 병. 사진 속 도시락 가득한 추억들이 이제는 나의 보물이다.

사랑의 깊이만큼 이별은 시리다. 아버지와 고모의 애틋한 정은 하늘마저 시샘했는지, 두 분은 평생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민 전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말없이 모든 고통을 삼키던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는 사랑의 덧없음과 영원한 그리움을 함께 읽었다.

아버지와의 시간은 장면마다 생생하다. 자전거 핸들에 달랑이는 답십리 통닭봉투, 생과자 가게 앞에서 입 벌리고 서있던 나, 그리고 아버지의 손. 선반을 돌리며 쇳덩이를 다듬던 공장 속의 오케스트라 같은 기계음, 그 속에 스며든 기름 냄새와 땀 냄새는 아직도 빗소리 속에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제대한 날, 아버지는 말없이 석간신문의 한 줄을 짚으셨다. 5급 을류 공무원시험. "와이셔츠 입고 근무하는 너를 보고 싶구나." 그렇게 동사무소로 발령받고, 몇 년 후 결혼식 날 양복을 입고 너털웃음 짓던 아버지의 모습은 내 기억 속 가장 멋진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삶은 늘 준비 없이 마무리된다. 구월동 병원에서 폐암 선고를 받고서도 의지를 잃지 않으시던 어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어머니의 회갑잔치였다. 회갑상 옆에서 미소 짓던 아버지는 두 달 뒤, 조용히 홀로 마전리 공원으로 떠나셨다.

장지문 위에 걸렸던 사진들이 이제는 어머니 옷장의 앨범속에서 나를 기다린다. 그 속의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고, 아버지는 변함없이 묵직한 품으로 나를 감싸고 있다. 사진의 배경은 이미 시간이 멈춘 곳이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삶의 이야기들이 찬찬히 스며나와 여전히 숨 쉬며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장면 하나하나에, 나의 기억과 사랑을 추억으로 묶는다. 흑백으로 빛바랜 사진처럼, 이 이야기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면서..

#길위의 인문학 - 시와미술 아카이브 사진선정 마지막 작업 / 2025.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