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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동네에서 만난 가을 본문
동네에서 만난 가을
아내도 아들도 볼일 보러 나간 한적한 오후,
잠시 외출하여 주인공원을 걷다가 문득 발길이 닿은 곳은 1990년대 신도시 개발로 상권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30년째 기능을 상실한 채 방치돼 있는 제물포시장이었다. 영화 '써니'를 필두로 여러 영화의 촬영장소로 쓰인다는 그곳은, 따가운 햇살 아래 건물들의 시간을 멈춰 세운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너진 창틀 안에 다소곳이 피어난 강아지풀들의 군상이 환하게 빛나고, 맞은편에서 마치 거인 로봇의 형상으로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건물의 풍경은 기이하면서도 새로운 상상을 주었다. 단순히 폐허라기보다는, 이곳 자체가 살아있는 거대한 전시장 같았다.
한때 사람들의 북적임과 삶의 열기로 가득했을 공간이 이제는 자연과 세월의 침묵 속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겨 넣는 느낌이랄까. 의레 보일 법한 쓰레기더미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풍경은, 그 쇠락함마저도 정제된 예술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쩌면 그 음흉한 미소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시장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시장을 뒤로하고 걷던 길목에는 또 다른 풍경들이 펼쳐졌다. 낡은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이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지나간 계절의 흔적을 붙잡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은 골목 카페가 자리하여 시장의 잊힌 이야기들처럼 조용한 울림을 전하는 듯했다. 굽이진 골목을 돌자, 벽면 가득 그려진 어느 무명 화가의 벽화가 가을 햇살 아래 선명한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폐허 위에 피어난 강아지풀처럼, 낡은 벽 위에 피어난 그 그림은 생명력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옮겨 주인공원에 들렀더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르던 나무들이 어느새 고운 단풍으로 갈아입고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나이 든 어르신들의 오붓한 산책 모습과 놀이터에서 해맑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원을 활기차게 채우고, 이제 막 학교를 파했는지 학생들이 단풍나무 아래 공원길을 귀갓길 삼아 오가며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는 묘한 안정감과 평화가 느껴졌다. 시장의 잊힌 시간과 공원의 현재가 교차하는 그 길 위에서, 시간의 흐름과 삶의 연속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무의식적으로 맞닥뜨리는 어느 곳이 또 다른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오늘 제물포시장이 그랬듯, 어쩌면 도원동의 옛 골목이나 배다리, 희망촌의 면면들도 그럴 것이다. 낡은 풍경들 속에 숨겨진 시간의 단층들이 나의 감성을 끄집어낼 충분한 장소가 되어줄 것임을 직감한다.
폐허 속에서 발견한 생명의 강인함에서 마주한 장면들처럼, 그 길 위에서 나는 또 어떤 잊힌 이야기들을 만나게 될까. 우유를 사러 잠시 나온 산책길이 가을에 물들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 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202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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