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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소리의 보모' 피아노 조율사 본문

음악이야기

'소리의 보모' 피아노 조율사

김현관- 그루터기 2023. 7. 11. 01:00

'소리의 보모' 피아노 조율사

 

 

피아니스트와 다른 연주자들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들고 다니지 않고, 직접 조율하지도 않습니다. 공연장이나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악기를 써야 하지요. 피아노 제작사의 협찬을 받고 있으면 해당 브랜드를 무대에 올려달라고 주문할 수 있지만, 매번 연주회마다 피아노가 바뀌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악기의 소리에 관한 한, 피아니스트는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기력한 어린아이'에 가깝습니다. 그런 피아니스트들을 달래주는 '소리의 보모가 바로 조율사입니다.

2010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이었던 '피아노마니아'는 조율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음악 다큐멘터리입니다. 독일 출신의 슈테판 크뉘퍼는 피아노 제작의 명가인 스타인웨이의 수석 조율사로, 알프레트 브렌델, 랑랑, 피에르 로랑 에마르 같은 당대 정상급 피아니스트 들과 작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뉘퍼의 삶은 평화로움이나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지요.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녹음하기로 예정된 에마르는 1년 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피아노 악기를 찾기 위해 조율사인 크뤼퍼를 달달 볶아댑니다. 이를테면 깊은 표현력과 내면적 울림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피아노의 전신(前身)에 해당하는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의 음색까지 냈으면 하는 것이 에마르의 바람입니다.

이런 악기가 실제 존재할 리 없겠지만, 크뉘퍼는 연주자의 바람에 근접한 악기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이 피아노가 호주로 팔려가는 바람에 녹음에 사용하지 못하는 비상사태가 일어나지요. 급히 대타로 쓸 만한 피아노를 수배하지만 이번에는 피아노 부품에서 미세한 결함이 발견되는 바람에 발만 동동 구르고 맙니다. 모두 잠든 한밤에 텅 빈 연주회장에서 피아노를 뜯어내고 홀로 부품을 교체하는 조율사의 모습에는 그야말로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한밤의 텅 빈 공연장은 조율사의 애환과 고독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조율사는 흔히 피아노의 음정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연주회장의 기온과 습도부터 천장의 높이와 악기의 사용빈도까지 피아노의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사실상 무한합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으면, 악기도 인간처럼 엄연한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기에 조율사는 행여 악기의 미세한 음향에 변화라도 생길까 두려워서 피아노의 음향 판에 켜켜이 쌓인 먼지조차 맘대로 털어내지 못합니다. 연주 도중에 피아노의 현이 끊어지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지요. 괴력의 러시아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스키가 내한 연주회에서 보여줬듯이 피아노 현은 한번 끊어지면 교체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리고, 연주회도 하염없이 지연되고 맙니다.

피아니스트든, 조율사든 이들의 작업은 결국 '올바른 소리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연주자가 선택한 소리를 판단하는 심판관이 청중이라면, 조율사의 심판관은 피아니스트라는 점이 차이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제목처럼 피아노의 소리에 미쳐 있는 음악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상적인 소리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조율사를 닦달하는 피아니스트와 그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밤새 악기에 매달리는 조율사 가운데 과연 누가 더 소리에 미쳐 있는(maniac)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