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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수원을 다녀 오던 날의 단상(斷想) 본문

내이야기

수원을 다녀 오던 날의 단상(斷想)

김현관- 그루터기 2025. 10. 4. 10:47

수원을 다녀오던 날의 단상(斷想)

어제는 수원엘 다녀왔다. 영통과 병점에 사는 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 친구는 치매에 걸린 노모를 정성껏 모시고 살아가고, 또 다른 친구는 암 투병 중인 아내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팍팍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임에도, 마주 앉은자리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이야기는 신기하리만치 밝았다. 대화의 물결 속에서는 그 어떤 슬픔의 그림자도 읽어낼 수 없었으니,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든 오랜 세월 그리 살아온 굳건한 마음 탓이든, 그 단단함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픔이 있어도 스스럼없이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삶이 주는 더없는 선물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다행스럽고 고마운 만남이었지.

수원에 갈 때는 정겨운 경인선을 타고 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수인분당선의 품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전철 안에서 한동안 서서 다녀왔는데,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꽤나 시원하고 아기자기해서 의외로 서서 가는 편이 나쁘지 않았다. 되레 분주한 도시의 단면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에 묘한 운치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 안산을 지나 겨우 빈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였다. 건너편 경로석에 앉은 한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익숙한 듯 '코리아 타임스'를 펼쳐 읽고 있었다. 잠시 기사를 훑어보던 할머니는 이내 볼 기사가 없었는지 신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전철에서 종이신문을, 그것도 영자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본 것이 대체 언제였던가.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풍경에 순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이 지긋함에도 안경 없이 작은 글씨를 읽어내는 그녀의 건강한 시력과 영자신문을 읽는 모습에서, 나는 경외심마저 느꼈다. 어쩌면 그건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아련히 사라져 가는 어떤 가치에 대한 쓸쓸한 경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풍경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바로 임산부 배려석이었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어떤 할머니를 보게 된 것이다. 그 자리의 목적을 모르지는 않을 터.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녀의 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문득 그동안 지하철 안에서 마주쳤던 비슷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폐경기가 한참 지났을 법한 여성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모습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곤 했는데, 어제는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심지어는 나이 지긋한 남성조차 거리낌 없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식의 수치심과 염치를 모르는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세대가 간혹 '꼰대'라며 씁쓸해하는 이유가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싶어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과연 저런 행동을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행동이 어떤 의미로 비칠지 알고나 있을까? 단지 몸이 힘들어 잠시 앉은 것이었을지라도, 반복되는 이런 풍경은 배려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세상은 제멋대로 살아가는 재미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함께 숨 쉬는 공간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며, 자신의 권리만큼이나 의무를 행하며 살아가야 비로소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의 당연한 배려를 권리로 착각하는 순간, 그 사회는 점점 더 메말라갈 것이다. 작은 배려가 모여 큰 온기를 만드는 법인데, 요즘 세상은 어쩐지 그런 작은 온기마저 차가운 냉대로 되받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길 위에서 마주한 이 상반된 풍경들 속에서, 나는 오늘 또 한 번 삶의 의미와 배려의 가치를 되새긴다.  202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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