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에서

장안사에서

"내성천"(乃城川)이 길게 늘어서 "장안사"를 찾는 일행을 반기고 있다.다리를 건너 꼬불꼬불하고 경사가 심한 좁은 길을 몇 굽이 돌아 "장안사"의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이곳부터 잠시 걸어 올라야 한다.마침 어느 교구인지 몰라도 이곳을 찾은 이십여분의 수녀님들과 함꼐 경사길을 오르게 되었다.

 가파른 경사길을 헉헉대며 오르는데 수녀님 한 분이 “ 얘는 왜 예의없이 이렇게 계속 가파른거야 힘들게시리...? 라면서 길에 대고 푸념하는 엉뚱한 말 한 마디로 주위의 사람들을 깔깔대게 하였다. 맑은 웃음소리가 아직은 푸른 나뭇잎들을 타고 창공에 퍼져 나간다.웃음 한 자락 내려 놓은 덕분인지 금세 "장안사"엘 도착할 수 있었다. "비룡산" 중턱 고즈넉한 곳에 터를 잡은 "장안사"는 흐르는 시간 따라 깊게 익어가는 가을정취를 보여 주고 있다.. 사찰의 그윽함에 마음은 정갈해지고 다소곳함이 우러 나온다.

 "장안사"는 천년고찰인데 무엇인가 빠진 듯한 느낌이다. 가만히 둘러 보니 여늬 절 입구에 의례 서있는 대문격인 "일주문"과."천왕문"이 없다.그러려니 하면서도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혼자만의 느낌일까? 그대로 언덕을 돌아 범종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발치에 허술하니 박혀 있는 표말에 시선이 간다.

 "깨달음이 있는 곳은 그 어디인가? 현재의 생사가 있는 바로 지금 이 자리.."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

 비록 불자는 아니라 해도 한마디의 간결한 경구가 주는 단호함에 그대로 고개가 숙여진다. 비록 "일주문"과 "천왕문"이 없어도 무언의 가르침으로 잠시 방자한 나그네의 심사를 꿰뚫는 표현이었다. 이어 "영산전"에 쓰인 "마음을 맑게 세상을 향기롭게" 하라는 단정함이 슬며시 가슴에 들어 온다.누구나 볼 수 있는 단 두 마디의 글이지만 스스로 깨우치라는 자연스러움이 녹아 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아가 성숙할 때 석가께서 주는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익힐 수 있음이라..

 어제 저녁 아내가 발을 접질렸다. 여행을 포기하자 했지만 기대감에 들떠 있는 남편이 서운해 할까 안 아픈 척 떠나 온 아내가 안스럽다. 꽤 불편할텐데 산길을 열심히 걷고 있다. "장안사"를 나서며 소원을 비는 작은 돌탑이 있어 아내가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으로 조그만 돌 하나 올려 놓았다. 여행중 아픈 아내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작 돌 하나 올려 놓는 것 뿐이니 미안한 마음에 속이 아린다...

 "장안사"를 뒤로 하고" 회룡포마을"의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회룡대"로 향하는데 계속 아내의 발에 눈길이 간다.이미 일행들은 앞서 나가 몇 명 보이지 않고 인솔자만 걱정스런 눈으로 우리부부를 바라본다. "회룡대"까지 250여 계단이라는데 아내는 아픈 것도 참고 씩씩하게 오른다. 아내의 모습 뒤로 소나무 둥치에 매어 놓은 신라시대 월명스님의 " 제망매가 " 구절구절이 눈에 찬다.

 나고 죽는 길이 / 여기 있어 두려워 /
나는 가노라 말 한마디 / 못하고 가는구나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
한 가지에 태어 났으나 / 가는 곳 모르겠다./
아아! 아미타 정토에서 만날 날 /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속세를 벗어 난 스님들도 속세의 연에 대한 심사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저토록 죽은 누이를 기리는 마음이 애뜻한데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의 마음을 만분의 일이라도 혜량한다면  몇 발치 앞에서 아픔을 참으며 계단을 오르는 내 아내의 마음도 이해하고 하염없이 사랑해야 함은 불문가지거늘..문득 아내에 대한 애뜻함이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깨달음이 있는 곳은 그 어디인가? 현재의 생사가 있는 바로 지금 이 자리.."

 "제망매가"를 음미하자 방금 깨닫던 표말의 가르침이 저절로 떠 오른다..무언의 가르침이 백마디의 말보다 효과적이다. 산사의 풍경과 산사의 정신이 주는 아름다운 가르침이다. 이 깨달음을 마음에 담자 아내의 손을 잡고 "회룡대"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진다.

  2012. 10. 6    - 그루터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