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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중구] 인천 화교역사관에서 본문
인천 화교역사관에서
화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 온 것은 1882년으로 , 임오군란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 여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이다.그 해 "상민수륙무역장정" 을 체결하고 1884년부터 화상조계지가 설치됨에 따라 당시 화교수는 인천에만 1,000명을 넘었다.
중국 산둥성 상인들은 화상(華商)특유의 거대한 자본과 풍부한 경험을 앞세워 1883년 개항한 인천 상권의 주류를 형성한다. 포목 수출입과 유통을 주름 잡았다. 여기에 항만과 마차 수송 등으로 물류를 독점하다시피 한다.1895년 청·일전쟁의 패전과 1911년 신해혁명에 따른 청(淸)왕조의 패망, 1913년 인천 청국조계지의 철폐로 인천화교의 경제활동은 하강곡선을 그린다.
1920년대 삼베와 비단, 광목, 소금, 고추 등 생필품을 다루던 인천 화교들은 음식점과 요리를 중심으로 인천 상권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데,공화춘과 중화루, 동흥루가 생기는 계기였다. 여기에 호떡과 만두집 등 요리집도 성행했다. 또 산둥성 옌타이에서 채소 종자를 들여와 인천 근교 일대에 농장을 경영했고, 생선과 함께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푸성귀전이었던 신포시장에 채소공급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인천 등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면서 포목점, 청요리, 채소가게, 이발소 등 화교 상점이 문을 닫았다. 인천의 상권의 중심은 일본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해방이후 무역업이 일시적으로 호항을 누렸으나 중국과의 국교단절로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1960년대 국내 화교들은 역경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1961년과 1962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와 2차 통화개혁으로 거액의 현금을 보유했던 화교들은 그야말로 수난의 시대를 겪는다. 1970년대 국내 화교들의 ‘엑소더스’가 이뤄졌다. 1970년 4천401명에 이르던 인천의 화교는 1987년 2천690명으로 급감했다.
1992년 한중수교이후 토지소유권제한이 풀리는등 각종 규정 및 차별적인 제한들이 완화되기 시작하며 대기업사원,전문직,사업가,유학생등으로 이루어진 신화교들의 숫자가 늘어 나며 지금은 그 수가 구화교의 5배에 이르고 있다.2002년 5월부터 영주권을 부여 받게 되었고 2005년 8월 선거법이 개정되어 한국의 화교들에게도 지방선거권이 생겨 2006년 5월31 지방선거부터 화교들이 지방참정권을 행사하면서 화교사회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렇게 날로 증가하는 한국화교들은 세계속에서 정치,금융,첨단기술등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한류와 한국경제에 이바지 하고 있으며, 인천에서는 중구 차이나타운를 중심으로 화교의 문화가 인천의 독특한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인천 화교 130여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 화교 역사관이다.
# 이 곳에 자료를 기증한 분중에 눈에 띄는 분이 있다. 짜장면박물관 바로 위에서 요릿집 "풍미"를 운영하고 계시는 한 정화씨인데 자신의 결혼증서등 다수의 자료를 기증한 것을 보았다.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첫번째 통장을 지낸 한 정화씨가 화교 역사 박물관에 개인의 소중한 자료들을 기꺼이 제공한 것을 보면 그동안 화교의 신분으로 인천에서 살아 온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진다.
1970년대 한국의 제도적인 규제로 인해 많은 화교들이 본국이나 제 3국으로 떠나 차이나타운의 수난시대의 중간이었던 80년도 초에 지금의 짜짱면박물관인 공화춘에서 마지막 만찬에 초대를 받아 24품요리를 대접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삼삼하다. 만찬이후 문을 닫고 쇠락한 모습만 보여 주다가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한 모습을 보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당시에는 지금의 풍미와 풍미앞의 대창반점,그리고 하인천지구대 뒤의 신승반점등 세 곳의 중국음식점만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활기차고 왁자스런 차이나타운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다.
201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