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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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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후에] 후에 성(城) / 2018.3

김현관- 그루터기 2023. 1. 29. 12:28

https://youtu.be/JqZ-Go53vSg?si=2htKGU7cd_YPhQF7

 

  후에 성(城)

'황성의 거대한 청동향로에 총탄의 흔적이 남아 
후에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였다.'

후에 황성은 1802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약 143년간 응우옌 왕조의 궁궐 역할을 했던 곳이다. 베트남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후에는 유적 전체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 파괴된 유적들의 복원, 보존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자금성을 본 떠 똑같이 만들었다는 황궁은 외성에는 해자가 둘러있고 황궁 앞에는 좌우로 대포진지가 있고 멀리 잔디광장에 베트남의 국기가 펄럭인다. 

규모는 대단하지만 성안으로 들어가면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전쟁으로 인해 거의 다 허물어진 빈 성터로 현재 복원 작업 중이며, 남은 잔해의 모습으로 보아 엄청난 규모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규모로 인해  걸어서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어 일면으로는 걷고 중간지부터는 전동카를 타고 이동하며 관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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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년 12월 6-11일 콜롬비아에서 열린 17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 WHC) 회의 에서 후에 건축물 지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후에가 베트남에서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세계문화유산 위원회는 후에의 가치를 다음과 평가하였다

 “통일 베트남의 수도였던 후에의 건축은 19세기 초에 지어졌으며 베트남의 전통과 동양의 철학을 함께 보여준다. 건축물과 자연의 어우러진 조화,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장식은 베트남 군주제의 전성기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후에성은 후에 건축물지역의 가장 뛰어난 관광지이자 볼거리로, 응우옌 왕조의 황제가 머물던 곳이다. 왕궁에는 오직 황제들과 첩들 그리고 측근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사형을 당하였다. 후에의 역사 관광지로서 유지하기 위해 재건축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오늘날 금지된 구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대에 걸쳐 이어진 응우옌 왕조의 왕궁(kinh thanh Hue)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성벽은 다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에 담을 물은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흐엉강에서 끌어왔다. 이러한 구조물을 시터들이라고 한다. 시터들 안에는 거의 2.5Km의 방어선을 구축한 왕궁이 있었다. 

대개의 관광객이 입장하는 왕궁의 정문인 남문 누각에 오르면 왕궁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남문 정면에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디엔타이호아가 있으며, 디엔타이호아의 왼쪽에 각 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원인 현임각이 있다. 그 외에도 왕궁 안에는 왕족의 저택과 사원들, 황제를 위한 인클로져인 자금성이 있다. 그 명칭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딴 것이다. 이르만을 본딴 것이 아니어서, 자금성에는 수많은 궁전과 문, 궁정들이 있었다. 자금성은 응우옌 왕조의 황족들을 위한 곳이었다.

 

https://youtube.com/shorts/jXd36iWb4oU?si=0nQELw9NQyZCak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