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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생일에 생각하는 고향 / 우선덕 본문

인천이야기

생일에 생각하는 고향 / 우선덕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13. 00:28

생일에 생각하는 고향  / 우선덕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지지 않아 종이에 셈한다. 고향 떠나 산 햇수가 37년째다. 오, 세월아 세월아, 소리가 절로 난다. 하필 생일이라 이 아침 인천의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야기도 세월이 화제다. 내 자식 늙는게 가장 속상하고 마음 아프구나. 네 생일에 밥 한 번 같이 먹어본 적이 없구나. 열아홉 번은 생일상을 마주했는데, 어머니에게는 과거가 없는지 저러신다. 곁에서 살지 않는 큰딸이 불만이시다.

대학 졸업하면 당연히 돌아와 살 인천일 줄 알았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이곳 생활을 벗어날 길 없게 되고 말았다. 서울 사람이랄 수 없고 인천 사람이라기에는 인천을 너무 모르는 어중뜨기 신세가 돼 버렸다. 그 세월 흐름이 꿈같이 잠깐이다. 지난날 정경이 안개 속인 양 아스라하다.

뇌리에 몇 장의 누렇게 바랜 장면, 장면, 대부분 거기엔 아버지 모습이 함께 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자주 시내로 불러냈다.

공보관 전시실이다.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홀엔 접이식 의자가 반원 형태로 놓였다. 성 씨만 기억나는 소프라노 아주머니가 단이 없는 맨바닥에서 가곡을 부른다. 청중이 몇십 명도 못 되어 조촐한, 무대랄 수도 없는 무대다. 허름하다 못해 추레하기까지 한 연주용 흰색 드레스를 입고 배를 떨며 열창하던 초라한 연주회. 두고두고 콧등이 시큰하다. 그분은 누구였을까. 이후 시절이 조금은 좋아졌을 때 따뜻하고 넓은 연주회장에서 공연을 더하긴 하였을까. 하지만 그런 연주회일망정 당시로선 획기적이며 힘들게 연 행사였을 것이다.

아버지들이 애용하던 다방에서의 전시회 풍경도 생각난다. 다방 안 벽면에 닥지닥지 걸려있던 서예작품, 동양화, 유화들, 그럴듯한 전시회장이라고 해봤자 공보관 전시실 정도였을 게다. 열정과 순정이 전 재산이었을 눈물겨운 분들. 전쟁 후여서 더욱 그랬겠지만 모든 사정과 환경은 열악하고 척박하기만 하였다. 아버지 하는 일만 봐도 노상 메마른 고목에 꽃피우기로 보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픈 낭만의 계절이었다. 인천을 생각하노라면 이렇듯 육칠십 년도로 기억이 먼저 달려간다.

격세지감이라더니, 상전벽해라더니 과연 그렇다. 내가 아는 인천은 오래된 흑백사진 속의 인천이다. 이젠 인천에 관하여 문외한이다. 경인운하 반대하는 시민에게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만 동조한다. 월드컵 축구 때의 인천 문학경기장도 화면으로 경험한다. 유독 근대유산이 많은 인천이라서 근대유산탐방 등의 문화행사가 빈번하고 음식문화제, 전통문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한다. 깨진 붉은 벽돌, 어린 날의 청관은 고적한 동네였건만 중국인의 거리로 새 단장되어 외지손님이 북적인다. 공보관, 시민관 등도 인천시사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연중 다양하고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한다. 아버지가 보수공사에 애쓴 자유공원 아래 시립박물관은 장소를 이전해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인천 문화발전이 참으로 눈부시다. 수시로 연극이 공연되며 음악회 팸플릿 속의 사진은 조명과 무대, 인원수부터 부유하다. 저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은 알려나싶다. 인천의 아버지 세대 분, 그 아래 세대분들이 굶주리고 찌그러지며 반석이 돼주었다는 사실을. 허나 모르면 어떠랴. 가신 분들은 알아주기를 원하여 그리 산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인천은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 올해는 세계도시축전도 인천에서 열린다고 한다. 굵직한 행사들이다. 그만큼 인천은 확장되고 성장했다. 몇 시간씩 버스에 흔들리며 수학여행 가던 강화며 바다 저쪽 섬들이 지금은 인천이다. 국제공항도 인천에 위치하지 않았느냐. 따라서 인천은 지리적으로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옆으로 누우면 어깨가 닿을 인천인데 일 년에 몇 번 가는 게 고작이다. 어머니와 형제가 있고 내 뼈를 굵게 해줬고 아버지가 묻힌 인천인데 특별한 일이나 있어야 겨우 간다. 고향이 이역만리라도 되는 양 꿈에 본다. 선뜻 발길을 하지 않는 이유는 게을러서기도 하지만 너무 많이 변한 풍정이 낯설어서다.

낙후한 옛날로 가자는 게 아니다. 다만 내 뼈와 정신을 키운 곳이라는 단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인천이기를 소망한다. 지켜질 것은 지켜지고 보존, 보전될 것은 그래지기를 바란다. 화려해진 외양만큼 내실도 있기를 기원하며 언제 어느 때 돌아가도 이곳이 바로 내 고향이라는 안도를 주는 곳이면 좋겠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개발과 발전만이 능사가 아니기에.

생일 저녁엔 추기경의 선종소식을 들었다. 새들도 세상을 뜨지만 추기경도 세상을 뜬다. 우주의 모든 것은 생명이고, 기억도 생명이라 종내는 소멸한다는 사실을 안다. 뇌리에 있는 슬픈 사진도 생명을 다할 것이다. 이 작은 머리에 인천의 화려한 무대, 세계를 향한 거리의 모습이 새로이 새겨지게 될 테며 그마저도 어느 날 낡고 삭아 소멸할 것이다. 

2009 리뷰 인천 창간호

우선덕 1954년 인천 출생, 고(故) 우문국 화백의 장녀, 소설가,

 

# 인천 한미문화관앞의 문화예술인들 맨윗줄 왼쪽이 우문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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