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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천역 부근 풍경 / 김윤식 본문
'하인천역 부근 풍경 / 김윤식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22-06-16 00:30:14
하인천역 부근 풍경 / 김윤식
2009년 리뷰 인천 창간호 / 특집 인천역
옛 하인천역(과거 한 시절 인천역을 이렇게 부르기도 했었다) 부근이 먼저 역 맞은편 오른쪽으로 청관 언덕과 패루에서부터 북성동 경사길 끝의 황해여관까지, 그리고 청관 언덕에서 마주보이는 건너편 파라다이스 호텔과 그 뒤쪽으로 지금의 8부두 자리쯤에 있던 경기어련(京畿) 부두와 공판장, 월미도로 향하는 중앙 길(이 길이 거의 지금의 8부두와 대한제분 사이로 난, 월미도 통행 대로와 일치할 것이다)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각종 젓갈을 담은 수백 개의 드럼통이 장관을 이루던 어시장을 모두 아우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분과 그 뒤쪽의 '북성구지', 더불어 대부분 인천역 부지로 편입되어 지금은 아주 조그맣게 흔적만 남기고 있는 외국인 묘지의 고즈넉했던 풍광도 물론 이 무대에서 뺄 수는 없다. 또 그 역의 옛날 인천전기주식회사 이야기도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파라다이스 호텔 바로 밑 제물포연초회사나, 그로부터 몇 발짝 서쪽에 서 있던 러시아영사관 자리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연안부두가 새로 매립된 항동 6가로 나가기 전까지 하인천역 일대는 말 그대로 인천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의 하나였다.
몇 해 전 인천 잡지 『황해문화에 이 일대에 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천에서 가장 인천적(仁川)이고, 또 가장 활기를 띠었던 곳은 어디일까. 주저 없이 옛 인천항구, 인천역 뒤 항동 일대의 연안부두였다고 말하고 싶다. 수백, 수천의 크고 작은 어선들과 바람에 펄럭이던 형형색색의 깃발들, 그리고 뱃전에 서린 그물과 철 따라 키만큼 큰 민어가 만선을 이루고, 그 흔하디 흔하던 굴비며 가오리, 갈치, 전어, 숭어, 넙치, 고등어, 우럭, 꽃게, 상합, 맛살, 새우가 넘치듯 풍어를 이루던 부두, 각종 젓갈류는 세상에 또 얼마나 풍성했던가.
돈 다발을 주고받는 상인들, 뱃사람들, 구루마를 끄는 인부며 지게꾼들의 외치는 소리, 다투는 소리, 온갖 생기 넘치는 활력과 소음과 싱싱한 바다 비린내가 진동하던 곳. 저녁이면 풍성한 해물먹을거리와 약주와 그리고 젓가락 장단 소리, 웃음소리, 여인들의 교태 짓던 소리…………. 그리고 막 노동자나 구루마꾼, 지게꾼들이 쭈그리고 앉던 인천역 앞 가로변의 노천 막소주 행상들, 거기 부글부글 시뻘겋게 끓고 있던 물텀벙이, 복국 등등……….
도서 지방을 운항하는 객선 부두와 함께 서해안 최대의 어항이 있었던 인천역 부근 일대는 들고나는 뱃사람들과 어업조합 등을 상대하는 대폿집 수효만도 수십을 헤아렸고, 비록 촉수 낮은 전등 불빛 아래서였지만 생선 비린내, 짜디짠 소금 냄새에 묻혀 정말 진하고 떠들썩하게 매일 매일 영화(榮華)를 누리던 곳이었다.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여기 항동 6가 부두는 썰렁한 오늘날의 연안부두와는 대조적으로 인천에서 가장 인천다운 활기와 낭만으로 생동했던 장소였음을 토박이 인천 사람들은 기억하리라.'
지금은 매립이 되어 그 땅을 대한제분과 대한사료가 차지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월미도에 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어시장을 통과하지 않고도 인천역 뒤, 지금의 북성부두 방향으로 대한제분 건물을 빙 둘러 우회해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로 가면 정면으로 넓게 펼쳐진 대한제분, 대성목재 두 회사의 매립지를 확연히 볼 수 있었다.
대성목재 매립지는 마치 서부영화에 나오는 황무지처럼 방대했다. 드문드문 원목이 쌓여 있었고 바닥은 모래를 덮어서 사막 같은 느낌을 주었다. 대한제분의 풍광은 한때 인천에 살았던 적이 있는 소설가 오정희가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 속에 아주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바로 이 길에서 좀 더 오른쪽 만석동 쪽으로 가면 외국인 묘지가 있었다. 인적도 없고 바람소리만 들리던 이곳은 야트막한 구릉지였는데 이 구릉 위에 돌담이 성곽처럼 둘러쳐진 언뜻 보기에 무슨 동화 속 나라 같은 외국인 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십자가 모양이나 방패 모양 등 가지각색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주위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제법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바닷바람에 섞여 묘역 전체에서 풍기던 그 사무치는 듯한 고요를 잊을 수 없다. 이렇게 비밀스럽기까지했던 외국인 묘지의 담을 몰래 넘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이 일대가 점차 도심화되고, 또 늘어나는 철도 부지의 수요에 따라 묘지 전체가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한 것이 1965년이다. 오늘날은 구릉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뭉텅 잘린 흙무더기 같은 공지(空地)와 늙은 아카시아 나무 몇 그루가 이리저리 기울어지고 그을려져 있을 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묘지 바로 옆에 인천전기회사가 있었다. 1905년 인천 최초로 설립된 전기회사였다. 송월동 2가 22번지인 이 자리에는 사진 속의 특이하고 멋진 건물 대신에 밋밋한 모습의 한전 창고가 들어 있다.
거기서 철길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밑을 지나면 북성포구가 나온다. 개천 같은 수로에 십여 척의 작은 고깃배가 드나들 뿐이지만, 배후에 인천역을 둔 덕에 철 따라 새우나 낙지를 받으러 내려오는 서울 손님이 북적거린다. 근래 물양장을 넓게 개수해서 그나마 요긴한, 그리고 낭만적인 도심 속 포구 노릇을 하고 있다.
파라다이스 호텔 밑에는 제물포연초회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대 초반 미국인 해밀톤이 담배회사를 설립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 언급이 있다. Chemulpo Tabaco Co.라는 이색적인 영자 상호가 페인트로 쓰여 있던 영미연초회사의 오래된 벽돌 건물은 화교 학교 기숙사로 변했고'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중학생 시절인가 그 영문자를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이 연초회사, 즉 화교 기숙사 건물은 1980년대까지도 그대로 있었다.
연초회사 자리 뒤, 러시아 영사관 건물도 대략 그 무렵까지 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만 무슨 개발 바람이 불었는지 속절없이 헐려지고 오랫동안 공터로, 또 건물이 세워지다 멈추고는 했었다. 대단한 미관은 아니라 해도 그대로 보존했다면 보기 드문 양관(洋館)으로 요긴한 관광자원이 되었을 것인데 아쉽게도 그러지를 못했다. 오늘 그 자리에는 생뚱맞은 건물 하나가 차지하고 있다. 그 옆, 인천역에 잇단, 8부두로 통하는 대로 위에는 월미도를 왕복하는 모노레일이 와서 서고 떠나고 하는 터미널 건물이 다락집처럼 세워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이 일대 풍광을 또 어떻게 변모시킬지……….
부두가 있던 시절에는, 현재의 패루가 서 있는 지점에서 황해여관으로 올라가는 직선 언덕길은 복을 끓이는 집, 백반집, 술집, 여관 등이 빼곡히 모여 흥청거리면서 은성한 시절을 누렸다. 술집과 여관은 주머니가 두둑한 뱃사람들이나 도서 출신 선주들이 주 고객이었다. 그 중에 최근까지 남아 있다가 사라진 대표적인 여관이 바로 황해여관이었다. 지금은 중국 음식점 흉내를 내어 '청관(靑'이란 상호를 단 새 건물로 바뀌어 섰다.
하인천역에서 동남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청관은 아주 고요하고 음울한 모습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신태범 박사의 글과 오정희의 소설에 아주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지물지물 눈물이 질척거리는 눈에 긴 담뱃대를 물고 정물처럼 앉아 있던 중국 남자들이나 전족을 한 중국 여인들이 크고 둥근 귀고리를 매단 채 뒤뚱거리며 걷던 모습은 그 무렵 큰 호기심거리였다.
1950년대 60년대 인천에 살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으로 거의 폐허처럼 변해 버린 청관 풍경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전쟁과 그로 인한 한국 사회의 피폐,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대 화교 정책 등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대만이나 미주 지역으로 떠나고, 청관은 그 퇴락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아주 음산할 정도로 쓸쓸했다. 그런 풍경을 주말이면 장차 화가를 꿈꾸는 학생들이 저마다 이젤을 받혀놓고 스케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곳의 이국적 풍경은 만주를 무대로 하는 독립군 영화나 상해 임시정부 같은 곳을 찍는 로케 현장으로 제격이었다. 특히 왕년의 전창근(全昌) 감독이 스스로 주인공을 겸한 영화 「의사 안중근」에서는 이 부근이 하얼빈시로 나오기도 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은, 이곳의 대표적 요릿집이 된 '풍미(美)'한 곳만이 남아 겨우겨우 만두와 중국 빵, 그리고 고량주에 자장면과 계란탕을 내놓았었는데, 지금은 자칭 산동요리네, 사천요리네 하며 저마다 일류라고 내세우는 요릿집이 수십 군데 성업중에 있다. 여기 터주의 하나라고 할 만한 대창반점은 이 무렵 '삼국지(三國志) 길 아래 끝, 하인천역이 마주보이는 약방 모서리에서 자장면 집을 하고 있었다.
하인천역, 아니 인천역 일대! 오늘날 인천의 변두리 지역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서 요즘 재개발 운운하고 있지만, 이 일대 운명이 어찌 될지 자못 염려스럽다. 예술적 미관같은 것은 전혀 고려됨이 없이, 의미 없는 괴물 시멘트 덩어리나 세우고 값싼 상가街)나 벌여 놓는 '재개발'이 아니기를 빈다.
설계 개념도 없이 아무렇게나 발라 세운 후면의 고가도로와 더불어 인근에 모조리 낙후한 집들과 먼지 나는 거리를 배경으로 가진 경인선 시발역, 1899년 한국 최초로, 철마가 서울을 향해 출발한 인천역인데 오늘의 모습은 그저 춥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런 느낌이다.
문득 여기를 이용하는 승객의 수에서나, 승객의 평균 연령에서나 아마 전국적으로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용객 수는 최저, 평균 연령은 최고령! 그것은, 그나마 억지춘향격으로 활성화시킨 청관과 월미도 구경을 위해 서울에서, 부천에서, 그리고 경기 인근에서 내려오는 정부 지원 '무임승차' 노인들 때문일 것이다.
인천역 부근 풍경을 회상하다가 그만 넋두리가 되고 만 느낌이다. 어려서부터 보고 느꼈던 그 '진짜 인천' 이 사라진 안타까움 때문이다. 하인천역 일대야말로 진정 인천에서 "가장 인천다운 활기와 낭만으로 생동했던 곳, 즉 인천항의 본체(本體)였고 인천의 정체正體였다. 죽기 전에는 그 풍광이 언제고 또렷한 잔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김윤식 1947년 인천 출생, 시인, 인천문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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