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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생상스는 왜 사랑받지 못했을까? 본문

음악이야기/클래식 & 크로스오버

생상스는 왜 사랑받지 못했을까?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8. 08:53

https://youtu.be/NerhU6CROd4

카미유 생상스 / 죽음의 무도(구스타보 두다멜)

 

생상스는 왜 사랑받지 못했을까?


수학을 사랑한 생상스

음악가 중에 개성이 너무 강해 비판을 받은 작곡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생상스의 작품은 교향곡 제3번 <오르간>(작품 78) 이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매우 명석하고 편안한 곡들이 많다. 그런데 생상스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은 특히 같은 나라 사람인 프랑스인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았다. 마치 그의 인생은 외면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 이유를 찾는 일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있는 프랑스 음악의 과제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음악학자로 잘 알려진 뒤프르크는 <프랑스 음악사>에서 생상스에 대한 분량을 마련해 두었는데, 여기서 그는 생상스의 음악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아한 대위법 작곡가였던 생상스는 음악이란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천성적인 리듬 감각이나 역동적인 특질이 있어. 그러한 음악을 감정 내지 감동보다 우위에 둔다. 일반적으로는 기본적인 악상의 질을 엄격하게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생상스가 이러한 것들을 전개할 때 어떻게 리듬을 반복하고 교차시키는지 그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이러한 냉정한, 빛이 나는, 정확한 그리고 집중도가 떨어지는 예술의 비밀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상스의 음악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합리적이지만 내용이 없다거나, 음악을 수학으로 변형시켰다는 비판이 빈번하게 제기된다. 뒤프르크의 설명도 기본적으로 이 의견을 따르고 있다. 정확하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라는 비평은 생상스의 담백한 사람 됨됨이와도 관련되어, 비판은 더욱 증폭되었다.

피아노 음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였던 알프레드 코르토도 《프랑스 피아노 음악>에서 생상스에 대해, 뒤프르크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약간 돌려서 그의 작품이 갖는 한계를 지적했다.

생상스의 창작 인생은 처음부터 비판과 함께 하는 역사였다. 기악 작품을 좋아하는 생상스는 필연적으로 독일 음악을 즐겨 연주했다. 그가 한 연주회에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베버, 슈만을 연주했을 때, 이러한 작품들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프랑스의 비평가는 이렇게 비판했다. “생상스 씨는 (……) 칙칙한 화음을 피아노로 치기만 하면 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생상스는 독일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후에도 오랫동안 비판의 표적이 되어, '독일 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교향곡 작곡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생상스는 첫 교향곡을 발표했을 때에도 자신의 이름이 아닌 무명의 독일 작곡가의 작품으로 초연했다. 초연 후, 프랑스인 생상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자 일부 사람들은 감동했으나, 일부는 교향곡 작곡은 본래 독일인이나 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바그너의 예술을 일찍부터 평가하여 그와 첫 교류를 시작한 프랑스인도 생상스였다. 이때는 아직 바그너의 예술에 대해 프랑스 청중의 귀가 트이지 않은 시기였다.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파리에서 상연되어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이 신예 독일파 작곡가의 작품은 프랑스인의 감성에는 매우 선정적인 작품으로 비쳤다. 1870년에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이른바 보불전쟁이 일어나 반 독일 정서가 높아지자. 이에 맞춰 바그너에 대한 비판도 고조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해 생상스는 "바그너에게 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이지만, 바그너를 두려워하는 것은 유치한 병이다"라고 냉정한 대응책을 촉구한다. 이와 같은 생상스의 태도는 또다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수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수학을 좋아한 그의 자질까지도 비판의 한 요인이 되었다. 즉 음악이 수학으로 변형되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생상스는 매우 명석했고 수학적인 세계를 사랑했다. 그러한 명석함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고리타분하고 천박한, 그러나 잘도 쓴

프랑스에서 세자르 프랑크 등 바그너를 이해하는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생상스는 이런 바그너 지지자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이해한 생상스였건만, 이번에는 바그너 음악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반동적인 존재라는 딱지가 붙어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프랑크와 그 주변의 작곡가들이 프랑스에서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을 지지하면서 생상스를 비난한다. 그에 대한 비판을 열거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형식주의적이다.""절망적으로 고리타분하다", "대단할 것 없는 천박한 작품의 대가. "졸렬한 그러나 잘도 쓴 음악" 등등.

이러한 비난에 드뷔시나 라벨과 같은 작곡가들도 동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애국운동이 단숨에 불이 붙어, 비판의 칼날이 생상스에게 집중되었다. 독일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생상스의 애국심이 의심받았던 것이다. 그가 프로이센으로부터 유공훈장을 받은 점도 비판자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라벨은 지원병으로 국가에 몸을 던지겠다고 표명했고 이어 자동차 수송부대에 배속되어 프랑스를 위해 협력한다.

열렬한 애국주의자 라벨은 생상스의 애국심 결여를 걸고 넘어졌으나, 이에 대해 생상스는 이렇게 자기변호를 했다.

“내게 프랑스가 첫 번째이고, 음악은 두 번째이다. 프랑스가 고통스러울 때 내가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상스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작품수는 많지 않았으나 전시 중에도 그는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다. 뮈세의 장난으로 사랑하지 말 것을 위한 무대 음악이나 바이올린을 위한 <비가> 등의 작품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해졌다. 라벨은 이렇게 비꼬았다.

생상스가 전쟁 중 많은 팬을 위해 무대 음악이나 가곡, <비가>, 트롬본을 위한 작품 등을 작곡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고 있다. 차라리 그가 작곡 대신에 수류탄이 든 통을 돌렸다면 그것이 더 유익했을 것이다.

생상스는 오늘날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정적인 평가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명석하지만 내용이 없다", "표면적이고 깊이가 없다"라는 평가가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면, 이는 아마도 우리가 또다시 19세기 말과 같은 정신 풍토 속에 빠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왜 생상스는 비판을 받았는가?

생상스가 독일 음악을 좋아하여 연구하고 그 작품을 자신의 창작에 도입한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19세기 초반의 프랑스에서는 오페라가 최고의 음악으로 여겨져, 기악 분야는 거의 불모지였다. 교향곡이나 협주곡, 실내악 작품은 오직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이 하는 일이라고 여겨지던 상황에서, 프랑스의 기악 창작에 의미를 부여한 첫 번째 인물이 생상스였다.

생상스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교향곡을 모델로 삼아 교향곡이나 실내악 작품을 작곡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창작 자세는 프랑스인답지 않다는 비난을 받았다. 기악 창작을 위해 형식이나 동기 등의 구조를 생상스 나름대로 마련하였으나, 그의 음악은 수학적이고 계산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생상스가 바그너나 브루크너를 직접 만나고, 교향시 창작 때 리스트의 영향을 받은 것도 비판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보불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는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바이마르에서 상연할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보불전쟁이 일어나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화에 휩싸이자, “생상스는 도대체 어느 편인가"라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있었다.

생상스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프랑스의 기악 음악을 낳은 장본인은 분명 그였다. 드뷔시는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생상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생상스가 1899년에 작곡한 <6개의 연습곡>의 제4곡 <라스팔마스의 종>은 드뷔시의 음악과 공통점을 느끼게 한다. 또한 이 연습곡의 제1곡 <장 3도와 단 3도>, 제2곡 <반음계 주법>, 제5곡 <반음계적 장 3도>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은 드뷔시의 <12개의 연습곡>과 주제가 중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