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형과니의 삶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뒷이야기 /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쇤베르크 본문

음악이야기/클래식 & 크로스오버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뒷이야기 /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쇤베르크

김현관- 그루터기 2023. 3. 1. 00:10

https://youtu.be/XeztLHt_ZNs

Dmitri Shostakovich - Tahiti Trot (Tea for Two)

 

재즈 애호가,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

20세기 작곡가 중에 재즈를 좋아한 인물은 꽤 많다. 미국의 거슈윈은 그 중 최고의 작곡가로, 그의 경우는 오히려 재즈에서 클래식으로 전향한 음악가라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드뷔시와 라벨이 그렇고, 힌데미트 (P. Hindemith)와 그의 스승으로서 프랑크푸르트 음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재즈 교육을 실시하여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제클 레스(B.Sekles), 재즈 오페라를 작곡한 크레네크(E. Krenek), 그리고 서푼짜리 오페라>의 작곡자인 쿠르트 바일(K. Weill) 등이 재즈 애호가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재즈에 대한 사랑은 우디 허먼 밴드의 위촉으로 작곡한 <에보니 협주곡>에 잘 나타나 있다. 에보니는 식물인 흑단(檀)이나 악기인 클라리넷을 가리키는데, 이와 동시에 흑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재즈의 리듬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잘 맞는다. 그밖에 <피아노 록 뮤직> 등 재즈에 영향을 받은 작품도 많다. 1919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유럽이 재즈에 눈을 뜨는 초창기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 활동한 쇼스타코비치 역시 미국 음악인 재즈를 사랑한 음악가였다. 당시 소련에서 재즈는 퇴폐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음악이었는데, <재즈 밴드를 위한 조곡>과 편곡이긴 하지만 저 유명한 <타히티 트로트> 등의 작품에서 그가 진심으로 편안하게 작곡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카바레 악장이었던 쇤베르크

20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을 창조하여 이후의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12음 기법에 따라 만든 이지적이고 추상적인 음악과는 달리, 그는 매우 왕성한 호기심의 소유자였고 세속적인 지혜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음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위버브레틀이라는 예술 카바레의 악장으로서 대중적인 음악에 종사한 시기도 있었다.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쇤베르크는 이러한 대중성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기의 독일은 대도시에서 문예 카바레나 예술 카바레로 불리는 살롱이 크게 유행했다. 이러한 카바레가 가장 빈번히 열린 곳은 베를린이었다. 이름에 문예나 예술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고상한 분위기의 카바레도 있었으나, 누드 댄서가 출연하는 상당히 저급한 곳도 많았다. 누드를 간판으로 내세운 카바레 중 유명한 곳이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였다.

카바레에서는 음악 연주도 했지만, 이른바 예술 음악과는 거리가먼, 대중적인 오락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카바레는 당시 폐쇄적이던 독일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통풍구 역할을 했으며,그러면서 때로는 수준 높은 대화가 마련되기도 했다.

1901년, 쇤베르크는 베를린의 위버브레틀이라는 예술 카바레의 악장으로 취임했고, 그 결과 카바레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다. 분테극장 소속의 악단은 피아노와 피콜로, 트럼펫, 작은북으로 악기를 편성하여,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의 표준 편성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가 작곡한 가곡으로는 호호슈테터의 시에 곡을 붙인 <경고>와 잘스의 시에 곡을 붙인 <분수를 아는 애인> 등의 작품이 있다. <경고>에서는 "아가씨, 그리 들뜨지 마오. 나비도 못 잡으면서 어울리는 남자를 찾으려 하다니"라고 노래하며, <분수를 아는 애인>의 가사는 이렇다. “우리 애인은 검은 고양이를 기른다. 부드럽고 보슬보슬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를 그리고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 반짝반짝 반질반질, 은빛."

쇤베르크의 이 음악은 어려운 화성도, 대위법도 없는 지극히 대중적인 음악이다. 가사도 보다시피 가볍기 그지없다. 그는 20세기초의 퇴폐적인 공기가 감도는 베를린의 한 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쇤베르크가 그린 자화상 또한 쇤베르크는 특히 테니스를 좋아했다. 대체로 작곡가들은 금욕적이고 특별한 취미가 없는 사람도 많지만, 그는 테니스를 비롯해 탁구나 제본 등의 취미를 즐겼다. 테니스는 취미라기보다 스포츠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어쨌든 그는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즐겼다. 음악가이면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쇤베르크 이외에 그의 테니스 친구였던 작곡가 조지 거슈윈이 대표적일 것이다. 음악의 장르는 전혀 달랐지만, 두 사람은 테니스라는 공통된 취미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쇤베르크는 재즈 어법을 활용한 거슈윈의 작품을 이해했는데, 그의 음악은 쇤베르크가 젊은 시절 위버브레틀에서 연주하던 음악과 통하는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슈윈 역시 난해한 쇤베르크의 음악을 연구했다.

쇤베르크가 언제부터 테니스에 열광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거슈윈과 친분을 맺은 시기부터 이 스포츠를 접하게 된 듯하다. 그는 매주 한 번, 거슈윈의 저택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함께 테니스를 즐겼다. 쇤베르크는 거슈윈과의 테니스 시합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으며, 1937년 5월 26일 이른 아침에 아들 로널드가 태어나던 날조차도 테니스를 치러 나갔다.

그의 왕성한 활동력과 생명력은 1946년 8월 2일에 그를 엄습한 심장발작까지도 물리쳤다. 당시 쇤베르크는 심장이 정지되는 상황에까지 놓였지만, 심장에 직접 주사하는 방법으로 심장이 다시 고동치기 시작해 새 생명을 얻었다. 이러한 생명력의 근원은 테니스로 길러진 건강한 신체 때문이었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