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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宮)과 그 전설 본문
조선 궁(宮)과 그 전설
知識 ,知慧 ,生活/옛날공책
조선 궁(宮)과 그 전설
14대 선조는 1593 년에 환도했다. 행궁에 살면서 15년 만인 1608년에 종묘를 재건했다. 그때 대내인 계림군 댁 옆에는, 한혜(韓)의 집을 비변사에서 쓰고 있었다. 대내가 좁아서 비변사를 쫓아내면서도 대궐은 고사하고 종묘 하나도 중건이 어려울 만큼 난후의 핍박은심각하였다.
15대 광해군은 1608년에 즉위했다. 허다한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1610년에는 사학(四學)을 재건했다.1611년에는 창덕궁을 낙성하고 환도한 지 18년 만에행궁에서 이어(移御)했다. 그리고 1616년에는 창경궁을 중수했으며, 또 경덕궁(속칭 새문안 대궐) · 인경궁(仁慶宮)·자수(壽宮)을 창건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광해군은 탐학을 저질렀다. 인경·자수• 경희궁을 지을 때 광해는 인왕산 밑 수천 호의 민가를 허물고 그 재목을 강탈했다. 또 목재·초석(礎石)·시탄(炭)·하철(鐵) 등을 바치는 자에게는 관작(官爵)을 주었기 때문에 소위 '오행당상(五行堂上)'이라는말까지도 생겼다(水火金木土를 바치고 당상관을 샀다고해서). 양주(楊州)의 한 총각은 전답과 정3품 통정(通政)을 바꿔서 도령주첨지(都令主僉知), 진해의 한 처녀는 면포(綿布)로 숙부인(淑夫人) 첩지를 사서 아기씨부인(阿只氏夫人)이라는 유머러스한 이름이 붙었다(숙부인은 정3품 문무관 부인, 즉 시집간 여자만이 받는 작호다. 아기씨부인은 말하자면 '처녀부인'이다). 그러나광해의 노작(勞作)도 경덕궁·창덕궁만을 남긴 채 인경· 자수궁은 16대 인조가 헐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 5 궁(宮)이라면 경복 창덕 · 창경·덕수 · 경희궁(경덕궁)이었다. 정궁(正宮)인 경복궁은임란 후 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273 년을 폐허로 있었다. 별궁인 창덕궁은 속칭 동관대궐이자 외인(外人)들은 황후궁(皇后宮)이라고 불렀다. 이의 부속물이던 창경궁은 옛날 수강궁 자리다. 덕수궁은 월산대군의 사저로 임란 후의 행궁인데 옛 이름은 경운궁(慶運宮), 고종이 중건하고 덕수궁이라 했다. 세문안 대궐이자 경희궁은 일제가 헐어 버렸다. 7궁(七宮)은 서출인 임금들이 사친(私親)을 봉사(奉祀)하는 사당이다.
그럼 그들 대궐에 얽힌 전설로써 마무리를 장식하자.왕십리는 태조가 궁터를 찾을 때 한 노파가 10리를 더가라고 했다는 데서 생겼다는 지명이다. 그런데 노파는방향은 말하지 않았다. 서북으로 10리를 갔기 때문에조선은 5백 년 밖에 지탱하지 못했다. 동북으로 10리를 갔다면 1천 년 왕업의 땅을 얻었을 것이라는 전설이있다.
이리하여 경복궁의 좌향을 정할 때 무학(無學)은 인왕산을 진산(鎭山), 북악과 남산을 청룡·백호로 하는 유좌묘향(酉坐卯向) 을 주장했다. 그런데 정도전(鄭道傳) 은 군주란 남면(南面)해서 정사한다는 이유로 임좌병향(壬坐丙向:南南東向)을 주장했다. 좌향이 남남서로 정해지자 무학은 2백 년 이내에 후회할 일이 있으리라고 하면서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산수비기(山水秘記)≫를 지적했다.
즉, 선도(都)하는 자가 승(僧)의 말을 안 듣고 정성(鄭姓)의 말을 들으면 5세(世)미만에 찬역의 화가생기고 2백 년 내외에 외환이 발생한다는 구절을, 아닌게 아니라 조선은 3대 태종의 골육상쟁과 7대 세조의 찬위(位)가 있었고, 또 개국한 지 꼭 2백 년 되던 해에 임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복궁 주초를 세울 때 기둥만 세우면 쓰러지곤 해서 무학은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한 농부가 밭을 갈다 문득 말하는 것이었다.
“이랴, 이놈의 소! 미련한 꼴이라니 꼭 무학이로구나!”무학이 공손하게 묻자 농부는 산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한양은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이요 궁터는 그 등에 해당하는 곳이다. 따라서 학의 날개를 누른 후에 기둥을 박아야만 쓰러지지 않는다. 무학이 대궐 담을 쌓은후에 기둥을 세우자 쓰러지는 변은 없었다는 전설이다.이 대궐은 둘레 9천9백75보(步)의 나성(羅城: 外城)이 8개의 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숭례문(남대문)의 현판만이 종서인데 숭례 두 자를 종서함으로써 충천하는 불을 상징한 것이다. 광화문 앞 관악(冠岳)을노리는 해태처럼, 남쪽 관악의 화기(火氣)를 제압하는 비보(椑補)다.
또 동대문 하나가 넉 자 흥인지문(興仁之門)인 것도 동방의 허(虛)한 지기(地氣)를 위한 보허(補虛), 명당과 비보의 관념은 조선시대의 대궐에도 이토록 뿌리깊게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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