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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3]서양미술사-바로크미술 본문

철학,배움,지혜

[3]서양미술사-바로크미술

김현관- 그루터기 2023. 7. 13. 08:49

[3]서양미술사-바로크미술

知識 ,知慧 ,生活/지혜,지식,좋은글


바로크 미술

1600년부터 1750년 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18세기의 비평가들은 마니에리즘과 마찬가지로 바로크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마니에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으며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같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경향이었던 것이다.

궁정적, 카톨릭 적 바로크와 시민적, 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는 상이하게 나타난다.이는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과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에 있어 내적 외적으로 다르게 묘사된다.

전자가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 고전주의적 " 양식으로 나뉜다. 바로크의 개념은 처음부터 고전주의적 흐름을 타고 있었고 이와 함께 카톨릭 국가들에서 자연주의적 조류가 있었다.

카라바조에 의해 대표되고 이는 후에 바로크 예술의 전반적인 예술 흐름이 된다.즉, 바로크는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가 있었고,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고딕 이후로 예술양식은 점점 더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갔다. 이런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들은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바로크를 기점으로 이런 분류방식은 의미를 잃게 된다. 즉 예술에 있어서 통일적 성격을 엄격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며 고전적일 수 있었고 분석적이며 통일적일 수 있게 되었다.

 미술가들이 대행했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은 갈릴레오나 뉴우턴 같은 과학자들이 대신하게 되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는 해외에 식민지를 앞다투어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에 뒤졌다.

반종교 개혁운동으로 카톨릭의 권위를 되찾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누리며 새로운 형태의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 수가 증가하고 절대주의의 승리는 궁전의 건축을 재촉하였다.

고전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모여든 수많은 미술가, 건축가 등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문화를 창출하고 교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카라바조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

 전시대의 예술을 이끌었던 전통을 거부한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였던 카라바조는 1573년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에서 출생했다.11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성인이 된 후 그가 태어난 지명이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이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라 부른다.

그의 자연주의적 회화관은 당시 반종교개혁 운동에 부수되어 가톨릭의 새로운 신앙과 맞물렸다. 더 이상 종교는 신비적인 것이 아닌 직감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는 모든 인습적인 것을 버리고 미술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 카랏치 Annibale Carracci(1560 ~ 1609)

 베네치아 학파 특히 코레지오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한 사람이었다. 평소 라파엘로의 그림에 매료되었던 그는 그의 화풍 즉 단순성과 미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빛과 우리 감정에 호소하는 그의 그림 양식은 과히 바로크적이라 할 수 있는 데 그도 카라밧지오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자연에 가까워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카라밧지오보다 신중한 개혁자였다.

 - 베르니니 Lorenzo Bernini (1598 ~ 1680)

 카라바조 작고 이후 등장한 17세기 최고의 조각가이며 건축가.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무시 되었던 육체와 정신이 그의 조각에서는 다른 견해로 부활한다.

즉 좀 더 힘이 주변의 공간에 확산된다. <다윗> 조각상이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고 이는 회화가 그때까지 수행해 왔던 일을 조각또한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바로크에 와서야 회화와 조각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없어진다. 그는 회화, 조각, 건축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일에 성공한다. 바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이 태동한 것이다

 - 벨라스케스 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6.6~1660.8.6)

 에스파냐의 화가. 세비야 출생. 처음 에레라에게 사사하고, 이어 마니에리스트 화가 파체코에게 사사하였다. 정신적으로도 이 문화도시와 스승 파체고의 영향을 받았으며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초기의 작풍은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1622년 수도 마드리드로 나가, 이듬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명암법에 의한 마지막 걸작은 《주정뱅이들─바커스의 대관(戴冠)》(1629)이고, 28년의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중기(中期)는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왕족·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들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본질적인 비극성까지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초상화의 대표작으로는 《왕녀 마리아 안나》 《왕녀 마르가리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50) 등이 있으며 또 큰 구도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성의 항복》(37)이 유명하다.

그 후 두 번째 이탈리아에 체류(49∼51)하는 동안 장기간 연찬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만년의 대작 《궁녀들(라스 메니나스)》과 《직녀(織女)들》(57)은 평생의 화업(畵業)을 집약한 것들이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선에 의한 윤곽과 조소적(彫塑的)인 양감(量感)이라는 기법이, 투명한 색채의 터치로 분해되어, 공기의 두께에 의한 원근법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전동(顫動)하는 빛의 파도에 씻기고, 완전히 대기를 파악하는 벨라스케스의 공간과 기법은 시대를 크게 앞질러 인상파의 출현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의 종교화·신화화는 모두 주제의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조형성 탐구라는 근대성을 지녔으며, 백색·흑색·회색의 해조(諧調)된 색채가 비속화나 이상화에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리얼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에스파냐 화단에서는 개성이 출중한 화가로서 평가되었다.

<출처:  http://www.fractal.co.kr/art/westart/index.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