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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한국의 가을 - 박 대인 본문

사람들의 사는이야기

한국의 가을 - 박 대인

김현관- 그루터기 2023. 9. 25. 10:50

한국의 가을 - 박 대인

내가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것은 바로 6·25 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인 53년도의 가을이었다. 그래서 나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바로 이 가을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맑고 푸르며 높은 하늘의 가을을 가리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배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터라 이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에는 마음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몇 번 해변가나 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의 단풍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범어사' 라는 절에서였다. 그때 마침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에 젖어들 때라 동양적인 풍경을 처음으로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첫 가을에 대한 아름다운 인상이 또 하나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찝차를 운전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추풍령쯤 되었던 것 같다. 높은산 고개턱을 넘고 있을 때는 벌써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높은 산언덕에는 초가집 몇 채가 지붕만 보이고 그 앞에는 노랗게 물든 포플러 나무가 몇 그루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붕 너머로 솟아오르는 연기가 나지막이 깔리고 희끄무레한 저녁 안개와 함께 가을의 대자연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는 전쟁터에서 피어나는 대조적인 한국의 평화스러움을 보여주는 한 폭의 동양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우글거리는 피난민, 폐허가 된 도시의 빌딩, 그리고 구제품을 나누는 아우성소리 등 고통당하던 상태와는 너무도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한국의 가을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지금도 가을이면 기회만 있으면 산에 가서 물든 대자연을 보고 싶어진다. 가을이면 천아니라 마만이 비도 포함되는 추수하는 모습의 풍경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나를 기억나게 하는 것은 감을 처음 먹은 때다. 미국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보지도 먹지도 못했었다. 그 터질 듯이 부드럽고 빨간 홍시는 나를 미칠 정도로 좋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송편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처음 본 것인데 처음에는 잘 먹을 수 없었다. 서양 음식에 비해서 너무도 차이가 많은 탓일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이고 노력하여 먹어본 후에 그 맛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살고 있는 동리의 이웃집이나 친구 집에서 떡을 하면 으레 가져오곤 하여 즐긴다.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식 만둣국이다. 이것은 떡과는 달리 처음부터 무조건 좋아했다. 추석날에 친구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의 집은 피난생활 중이어서 조그만 방에서 식구들이 함께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때 나온 음식이 바로 만둣국이었다. 따뜻하고 조그만 온돌방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의 꽃을 피우면서 맛있게 먹었던 것은 처음으로 맛보던 고소한 깨소금의 맛과 함께 나의 기억에서 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가을이라면 언뜻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전쟁 직후라서 더 아름답게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음식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 좀더 한국의 가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추수하는 가을의 한국 농촌풍경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추수기, 이는 얼마나 오랫동안의 농부들의 기다림인가? 한동안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나날이어야 하지만 어렵지가 않다. 이는 오랫동안의 바람이고 소망하던 성취의 결과여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영양이 생기고 힘이 돋나보다. 가슴속에서까지 파고드는 가을 바람은 또한 일이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남쪽 나라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는 변동의 자극에 대해서 느끼질 못한다. 새 희망을 불어 넣고 깨우침을 주고 영양을 공급하는 가을을 가진 한국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또한 가을은 색깔의 조화를 빼 놓을 수 없다. 물론 이른 봄, 모판의 애기모는 카펫을 깔아 놓은 듯이 아름답다. 여름의 쨍쨍 내려쬐는 햇볕아래 자라나는 벼의 색깔 또한 싫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추수기의 가을 벼이삭에 비길 수가 있는가? 황금빛으로 물들은 가을 벌판에 소슬바람 부는 대로 출렁이는 금빛 파도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국의 가을의 으뜸이라 할까?

그런데 특별히 잊을 수 없던 가을의 풍경이 있다. 동해안으로 내리 뻗는 높은 산맥의 줄기를 넘어 가노라면 높은 언덕으로 가리었다가 갑자기 앞이 바다를 향해 훤하게 트인 내리막의 벌판을 볼 수 있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마음의 트임이라 할까? 환등기로 하나의 풍경을 보는 느낌이었다. 내다보이는 바다의 빛깔은 푸르다 못하여 짙은 감색으로 밑바닥이 없는 무한한 심연같다. 광선이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마치 바다에 관한 옛날 그리스 신화가 펼쳐진 듯하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움을 조화 있게 하는 것은 산의 골짜기를 따라 층층으로 반달 모양을 한 논과 밭에 펼쳐진 익어가는 벼 이삭이나 조 이삭이며 물든 단풍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리라. 이는 훤하게 트이는 나의 마음과 함께 한동안 넋을 잃게 하였고 한국의 재래적 문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옛 신화를 생각게 하며 인간과 자연의 일치와 호흡을 맛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든 한국의 아름다움은 아마도 한국의 초가지붕의 아름다움에서 집약될 것 같다. 거의 매년같이 손질을 해야 하는 불편이 있기는 하지만 초가지붕은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초가지붕을 벗긴 후에 보아야 그 아름다움이 어떠한가를 더 실감할 수가 있다. 슬레이트만 올린 집은 마치 살이 없는 백골만 남은 사람 같다. 그러나 초가지붕은 어딘지 여유가 있어 보이고 풍부하고 살쪄 보인다. 이는 자연과 아주 가까워진 탓일까? 아마도 자연과 가까이 사는 인간의 지혜를 보기 때문이리라. 불편하기에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에 먼저 사라져 가는 초가지붕을 생각하면 아름다움을 멀리하게 된다는 아쉬움을 금할길 없다.

그러나 가을은 역시 슬픈 계절도 되는가 보다. 나도모르는 사이에 기분이 울적해지고 분석키 힘든 슬픈, 외로운 감정이 든다.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을 향한 문턱이기 때문일까? 추수라는 것이 자연의 성취를 이룬 것이지만 이 성취 다음에 오는 허전함에서일까? 인간은 누구나 목적과 목표의 상태에서는 의욕과 계속적인 창의가 생기지만 일단 그 목적이 성취될 경우 다시 계속적인 목적과 새로운 출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가을은 성취와 출발 사이에 공백 기간을 가지게 되니 허탈감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자기의 독특한 시적인 뜻이 있어 한 말이기는 하지만 한국은 '10월이 가장 잔인한 달' 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갑자기 추워진 날 밤에 택시를 탄 적이 있다. 택시에 타면서 아이 추워" 라고 하니 운전사의 말이 "잔인한 날씨" 라고 응수했다. 나는 어떻게 날씨에 대해 잔인하다고 하느냐 물으니 추워지면 월동준비를 재촉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정말 겨울 준비의 걱정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날씨가 추워질 때마다 김장이며 연료, 시탄 준비와 집단장에 일손이 바빠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드디어 한국도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아름다운 단풍과 금잔디, 황금 벌판이 물결치지만 그 속에서조차 무엇인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을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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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인
(포이트라스) 박사가 한국에 온 것은 기독교 선교사로서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선교사로서의 직분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로서의 직분을 위해 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비중 못지않게 한국 문학창작과 문학작품의번역에도 주력해왔다. 그는 영문으로 소설을 쓰고 시를 창작 발표하고 있으면서 문화 · 사회 비평을 겸한 에세이스트로서 뿐만 아니라한국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까지 매우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또한 그는 한국 사람과 다름없는, 바로 한국사람 · 한국시민의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비평하고 반응하는 한국에 젖어버린 미국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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