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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드 Jon Lord의 내면의 풍경 Pictured Within(1999년) 과 음표 너머 Beyond The Notes(2004년) 본문
존 로드 Jon Lord의 내면의 풍경 Pictured Within(1999년) 과 음표 너머 Beyond The Notes(2004년)
김현관- 그루터기 2023. 3. 2. 15:41
존 로드 Jon Lord의 내면의 풍경 Pictured Within(1999년) 과 음표 너머 Beyond The Notes(2004년)
새벽 두 시. 골목 안 풍경은 늘 그렇듯 진공 상태와 같지요. 달빛이 하얗지만 그 그림자가 우울해 보입니다. 무표정한 밤 골목. 그러나 가끔은 잠들지 못하고 무언가 낮에 못다 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불 켜진 창문이 있겠지요. 누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반가운, 그러나 쓸쓸해 보이는 불빛, 목적지도 이유도 없이 걷는 밤 골목 산책은 이름 모를 외로운 불빛들과의 조우만이 내가 걷고 있음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문득 저 앞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불 켜진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낡은 건물 일층에 작은 스피커 하나가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누가 틀어 놓았을까요? 살풍경한 밤길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데도, 살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밤길을 걷는 도시의 고단한 나그네들을 위해 누군가 선물한 것일까요? 작고 낡은 스피커에서 또 무슨 멜로디가 흘러 나올까 궁금해집니다. 그 앞에 서서 잠시 그 열악한 음악 소리에, 오가는 빈 택시 소리에, 오월인데도 싸늘한 밤공기에 젖어 갑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만 그렇게 한동안을 서 있는 것이 어색해집니다. 잠시 동안 가진 나만의 시간, 그러나 알 수 없는 누군가와 함께한 것 같은 시간. 발걸음을 떼자마자 마음속에 서운함이 스며듭니다.천천히 마치 실험실에서 몰래 나온 미완성 인조인간처럼 무뚝뚝하게 또 걸어갑니다.
이 밤에 몇 개 되지 않는, 그리고 익숙한 불 켜진 창문이 하나 벌써눈앞에 다가옵니다. 주소보다는 귀소 본능이 앞서는 나의 집 앞 걷고 걸어도 세상에서 만나는 것 가운데 가장 익숙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늘 나의 냄새가 있는 처소, 조금은 맑아진 머리, 이제 또 종일을 고민해도 나오지 않는, 누군가 읽어 줄 글, 혹은 나 자신에게 들려줄 말을 채워가야 합니다. 밤이 새벽이 되고 새벽이 아침이 되기 전에. 플레이 버튼을 누릅니다. 비로소 일상의 덤불에서 거장의 속삭임 속으로 차원 이동할 준비가 조금은 된 것 같으므로.
70년대 록 음악의 거대한 표상이자 하드 록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딥 퍼플Deep Purple 시절의 존 로드 Jon Lord와 칠십 대의 할아버지가 된 지금의 존 로드를 비교해 보면 그 자체로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합니다. 쓰는 사람에 따라서 성찰이나 완숙의 예가 될 수도 있고, 무상함에 불과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테지요.
전성기 시절 딥 퍼플의 걸작 불태워 Burn에서 리치 블랙모어의 기타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숨 막히는 속주 경쟁을 하던 존 로드 키보드를 떠올려 봅니다. 딥 퍼플이나 화이트스네이크 Whitesnake 같은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틈틈이 명백하게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징표로 남겨 온 장인으로서의 면모를 간과한다면 40년이라는 시간은 그저 상투적으로 '긴 세월일 뿐입니다.
70년대 초의 저 아찔한 명성에 집착하지 않고, 상업주의의 관습과 지지자들의 광기에서 자유롭게, 그저 조용하게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초월과 성찰의 선율을 가다듬어 온 거장. 그는 다행히 거장의 아우라를 공연히 휘두르거나 과도한 침잠을 일삼거나 하지 않는 서정주 의자이자 자연주의자로, 그저 오늘의 풍경, 사람과 자연의 심연을 피아노와 현에 담고 있습니다.
1970년의 쌍둥이자리 조곡 Gemini Suite으로부터 시작된 존 로드의 개인 작업은 1976년의 사라방드 Sarabande와 1982년의 『내가 잊기 전 Before I Forget」에서 정점에 오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때까지 존 로드는 하드 록의 비트와 화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보컬 트랙에서는 더 그랬습니다. 적어도 밴드의 외연과 내연을 아우르는 그는 단지 클래식 (정확히는 바로크 음악)과 하드 록의 교배에 성공한 선구자로서, 거침없는 실험 결과물을 양산하는 저돌적 인물이었지요.
그의 음악 문법을 상징하는 두 축, 록과 클래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애초부터 운명이었을 테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딥 퍼플이나 화이트스네이크 시절의 동지들과 그 필생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부분 협업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리치 블랙모어처럼 영국 전통 포크의 문법으로 연착륙한 경우가 눈에 띄는데 블랙모어의 변신 또한 평생 동지이자 경쟁자인 존 로드의 장인적 태도에 영향을 받은(심지어는 질투일 수도 있는) 결과일 것입니다.
결국 1999년의 내면의 풍경 Pictured Within에 와서 그가 꾸준히 추구하던 클래식 사운드 위에, 놀랍게도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뉴에이지의 영성을 가득 담은 내용과 형식이 한꺼번에 흘러나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숙성의 결과임이 분명한 내면의 풍경을 암시하는 네 개의 주제 안에 해가 뜨고 해가 지기까지의 대지와 하늘의 변화를 응시하는 존 로드의 명상적 언어는 그가 지켜 온 키보드와 피아노 의절 대적 권위마저도 무색하게 만듭니다.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소프라노 색소폰이 어쿠스틱 피아노와 이루는 앙상블은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처럼 때론 장엄하게, 때론 밤이슬처럼 처연하게 아름답습니다.
장 미셸 자르Jean Michel Jarre 나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에게서구조주의적 건축가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면, 존 로드가 만든 근년의 음악들은 흑백사진과 추상화의 접목이 떠오릅니다. 이 앨범에서 가장 '존 로드다운' 트랙인 풍차로부터 From The Windmill」에서는 운명에 굴복하거나 상처받는 인간의 심연을 풍차에 비유한 철학적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2004년에 발표한 『음표 너머에Beyond The Notes는 여러 의미에서 내면의 풍경 Pictured Within과 맥이 닿아 있는 작품이어서 오 년의 간극이 있지만 연작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우주와 자연과 시간의 심연과 변화를 객관적이고도 쓸쓸하게 응시하던 냉정함이 이제는 사람과 가족과 친구, 그리고 과거 기억을 향해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 육십 대 후반이 된 자신의 지난 시간을 그 그림자까지 다 껴안을 수 있는 지점에, 그의 길고 긴 성찰이 닿았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존 로드의 페르소나를 목소리로 전담하는 밀러 앤더슨Miller Anderson과 샘 브라운 Sam Brown의 음성 또한 오 년 사이 많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들의 우정이 평평한 대지 위에 뿌리처럼 소리 없이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그의 음악은 저마다 지닌 내적 외상을 스스로 쓰다듬게 합니다.
젊은 시절 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과의 조우를 묘사한 진중하며 아름다운 곡 그와 악수할 때의 미소 A Smile When I Shook His Hand」와, 밀러 앤더슨이 굵은 낙엽처럼 노래하는 11월의 인사 November Calls」는, 특히 상처를 드러내는 일에만 익숙할 뿐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는 미숙한 우리에게, 모든 것은 우주의 불가해한 법칙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니 삶의 지층 속 내면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거장의 성찰이 느껴집니다.
Jon Lord의 음표 너머에 Beyond The Notes 중 November Calls
Jon Lord의 Pictured Within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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