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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조동성님의 내가 본 당구사 4/4] 본문
[조동성님의 내가 본 당구사 4/4]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4:41:53
한국 최초의 3쿠션 대회-초대 챔피언에 조동성
1957년 10월 19일, 20일에 ‘대한당구협회 부산지부’지부장(전병학) 주최로 경남 고등학교 강당에서 전국당구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종목은 4구식 경기, 3쿠션 경기 2종목이었다. 대대에서 3쿠션 경기가 개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울에서는 필자와 박수복씨, 그리고 1957년 5월에 있었던 제2회 전국당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석영씨가 초청선수로 대회 전일인 18일에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대회 첫날인 19일에는 3쿠션 경기가 벌어져 100여명의 선수가 토너먼트로 경기를 거행하였는데 필자가 우승을 하였다.
다음 날엔 4구식 경기가 벌어졌는데 최고조에서 부산의 윤진태씨와 대전하게 되었는데 사정에 의하여 필자가 기권함으로써 윤진태씨가 우승했다.대회가 끝난 후 전병학씨, 이건종씨의 초대로 송도의 월명관에서 30여명의 관계자가 모여 대회 축하연을 베풀었다.
월간당구지 창간되고 대한당구선수회도 발족
1958년 1월 30일에는 방달성씨가 발행한 월간『당구』지가 나왔다.
『당구』지는 3회 발행 후 중단되었다. 1958년 2월 15일에 을지로 1가의 PX회관에서 대한당구선수회가 발족되고 초대 회장에 방달성씨, 부회장에 필자와 박수복씨가 취임, 선수들의 기술향상과 지도에 임하게 되었다.
빨간공치기 내기당구 성행 - 깡패와 손잡아야 영업도 해
자유당 말기부터 빨간공치기가 유행하기 시작하여 각 당구장마다 내기당구가 성행하게 되었다. 빨간공치기는 하점자보다는 고점자에게 더욱 유리한 경기여서 어떤 선수는 큐 하나만을 들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일반인들을 골탕 먹이는 일도 일어나게 되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은 직장인들대로 내기 당구를 치는 바람에 당구계의 혼란은 6·25때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인 혼란과 더불어 이른바 깡패들의 횡포는 극에 달하여 각 장구장들은 그 지역의 깡패들과 손을 잡지 않고는 영업을 할 수가 없었다. 깡패들은 소위‘기도’라는 미명 아래 도박당구를 치게 하여 돈을 딴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몫을 갈취했을 뿐만 아니라 당구업소의 수익금에서 일부를 상납하게도 하였다. 그런데다가 당구업소의 운영이 다방이나 일반 음식점들의 운영보다는 수월하다는 생각에서 당구의 당(撞)자도 모르는 여자마담들이 당구장을 개업하는가 하면 무허가 당구장도 전국 도처에 난립하게 되었다. 이래서 각 당구업소간에는 치열한 손님 쟁탈전이 벌어졌다. 손님들에게 다과를 대접하는가하면 식사까지 무료제공하는 업소도 있었다.
5·16 혁명과 당구질서 확립 - 재정비 단합 위한 대회 개최
5·16 혁명과 더불어 무허가 당구장과 각종 유흥업소의 단속이 시행되면서 내기당구를 치는 업소에 대한 단속도 시작되었다. 이로써 건전하게 당구장을 운영하던 업소들은 오랜만에 가슴을 활짝 펴고 떳떳하게 영업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1961년 8월에 혁명정부가 수립되면서 모든 당구업소들은 보사부 산하의 환경위생협회 당구분과위원회의 지도하에서 온갖 질서를 바로 잡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당구계의 재정비와 단합을 위한 첫 행사로서 제1회 당구대회가 개최되었다. 1962년 11월 서울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는 김경호씨(500점)가 A조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어서 1963년 11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에 걸쳐 제2회 당구대회가 서울의 신문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병호 선수가 3쿠션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벨기에는 당구를 국기로 정해
일본은 동경올림픽 때 유도, 당구, 검도, 가라데 등 4종목을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구는 채택되지 못했다. 이와 같이 당구를 장려하고 관심을 가진 나라가 국제대회의 개최국이 될 경우 당구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될 확률은 크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당구에 대하여 거국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일본을 비롯하여 당구를 국기로 정한 벨기에, 미국, 영국, 블란서, 페루, 오스트리아, 에콰도르, 이집트, 아르헨티나 등이다. 1988년도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장애자올림픽에는 당구경기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는 1968년 4월경부터 일본의 당구대 회사를 상대로 연간 약 500대분의 당구대 석판을 수출하고, 초크도 70년부터 일본으로 다량 수출했다. '75년부터는 큐 제작용 캐나다 목재를 수입, 외국에서 들여온 당구기자재 카탈로그를 표본으로 세계적인 수준에 육박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등, 당구기자재의 완전한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1977년 1월에는 세계당구연맹에도 가입하였다.
전국 4구 선수권대회 이어 3쿠션 전국대회 열어
장충체육관에서 「제3회 전국 4구선수권 대회」를 이어 1970년 9월 19, 20일 양일에 걸쳐「제5회 전국 4구선수권 대회」가 광화문의 시민당구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조성철 선수가 우승하였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969년 6월 21일과 22일에는 「제1회 전국 3쿠션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광웅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였다. 전광웅 선수는 전광웅이라는 본명보다는 ‘이리 꼬마’라는 별명으로 여러분의 귀에는 더 익어 있을 것이다. 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2년 후인 1971년 11월 13일과 14일에 동심당구장에서 개최된 「제6회 전국 4구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여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한·일 친선당구대회
다까끼(高木正治)씨가 여러번 한국에 와서 고국의 당구 기술 향상을 위하여 당시의 협회장이던 이한구 회장을 비롯한 당구협회의 임원들과 논의하였다. 그 결과 매년 1회씩 한·일 친선당구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격년제로 4구식 경기와 3쿠션 경기를 갖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1972년 5월 13일, 14일 양일간에 걸쳐 명동의 성림당구장에서 「제1회 한·일 친선당구대회」가 4구식 경기로 개최되었다. 다까끼씨가 선수단장으로서 7명의 일본선수를 인솔, 서울에 왔는데, 이때 24세의 아오끼(靑木) 선수가 세리를 어찌나 잘 치는지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에 놀란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해 6월 12일 다까끼씨 입석하에 서울에 거주하는 20여명의 선수가 모여 「서울빌리아드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필자를 선임하였다.
이후 매월 2회씩 회원 약 30여명이 모여 4구식 경기 연구회를 갖게 되었는데 6월 18일부터 내가 운영하는 유신당구장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여 20여 차례의 순회연구회를 가졌다. 그 결과 양귀문, 전광웅, 박용인, 신항균 등의 선수가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어 1972년 11월 25일에 안암동의 상아당구장에서 개최된 연구회 추계대회에서 이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연구회의 목적은 첫째 기술향상, 둘째 선수간의 단합, 셋째 국위선양이었다.
1973년 5월 「대한빌리아드선수회」(박수복 회장)가 발족하게 되어 제1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73년 4월에 제2회 한·일 친선당구대회가 명동의 성림당구장에서 3쿠션 경기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선수로는 정상철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었고, 세계3쿠션대회에서 5위에 입상한 바 있는 가시끼 선수와 다까끼씨의 묘기공 시범이 있어 관중들이 시선을 끌었다.
양창종 회장 3회 대회 개최
1974년 4월 13일, 14일 양일간 제3회 한·일 친선대회가 무교동 무교당구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일본의 아오끼 선수가 우승을, 2위에 전광웅, 3위에 박병문 선수가 입상하였다. 다음해인 1975년 4월 26일에 제4회 한·일 친선대회가 종로의 성림당구장에서 3쿠션 경기로 개최되었다.
필자는 이때 한국측 선수단장으로서 책임을 맡고 예선전을 거쳐 뽑은 우리측 선수들을 강화훈련을 통하여 전력을 강화시킨 후 경기에 출전을 시켰다. 그래서 대회 결과, 한국이 49전 32승 12패 5무라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하였다. 그래서 1위에 한상화, 2위에 김용석, 3위에 정상철 선수가 입상함으로써 1, 2, 3위를 모두 우리가 휩쓸었던 것이다.
제5회 한·일 친선대회는 1976년 10월 10일에 허리우드당구장에서 당시 협회장이었던 박성오씨가 참석한 가운데 4구식 경기로 거행되었다. 일본측 선수로는 가쯔라와 기시끼 등이 참가하였는데 이때도 1, 2, 3위를 한국의 정상철, 양귀문, 김동수 선수가 각각 차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한국측 관계자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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