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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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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이야기

조동성-6.26전쟁 전후의 황금시대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8. 00:20

조동성-6.26전쟁 전후의 황금시대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2:31

6·25전쟁 전후의 황금시대

군정이 끝난 1948년께부터 506월 전쟁 발발까지의 혼란시국은 한편으로 유락가(遊樂街)로선 최고의 황금시기였다. 너도 나도 모두가 삶의 지표를 찾지 못해 떠돌다 보니 발길 닿는 곳이 그저 유흥가였다. 거리마다 애상조의 유행가 가락으로 넘쳤고 한 잔 술에 시름과 회포가 오갔다.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술집과 댄스홀은 밤낮없이 문전 성시를 구가했다.

당연히 당구장들도 제철을 맞기는 마찬가지여서 당구대마다 불티를 날렸다. 이 시절 나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당구장이 있으니 충무로 2가의 태양당구장이다. 서울시내에서는 가장 연륜이 오래고 1급 당구장으로 명성을 자랑하던 이곳은 하마터면 대포집이 될 뻔했었다.

원래 그 장소는 일제 때의 최고 사교장이던 옛 지하지가(志賀之家)구락부(당구장)로 해방이 되자 박성희(朴星熙)씨가 물려 받게 됐다. 지하지가는 내가 혜화전문 재학시절 3쿠션 게임의 단골 연습장이었다.

해방 직후 미처 직장을 갖지 못했던 나는 저녁나절이면 명동 일대의 옛 당구장을 순방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다. 이미 말했듯이 대다수 당구장들이 살롱이나 술집으로 변해 버려 상심이 컸을 때 이 지하지가만은 폐장인 채 한 가닥 기대를 걸게 했다. 그런데 하루는 내부 단장이 한창이어서 반가운 김에 주인장을 찾으니 박성희씨였다.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술집을 차릴 셈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몇 날을 두고 그를 설득했다. 옛 지하지가구락부의 내력과 명성을 돌려 주고 앞으로의 전망 등을 사뭇 애원조로 얘기한 끝에 간신히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방해꾼이었으나 훗날 그런 대로 영업이 번성했으니 다행스럽다.

태양당구장도 개업기념 당구대회를 개최했는데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1백여명의 참가선수 중 단 한 명 홍일점 여성이 들어 있어 장안의 화제가 된 일이다. 외국에서는 여성 고점자들이 많으나 국내의 공식 대전에서는 이때가 처음인 듯싶다. 화제의 주인공은 샹하이에서 귀국한 이정숙씨(당시 25)로 직업은 미용사. 아마추어로서는 수준급 실력이었으나 프로들을 당할 수 는 없어 중반전에 탈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구계의 아마추어리즘은 그대로 지켜졌는데 우승자에 대한 시상품이 그 좋은 증거였다. 5돈중짜리 순금 반지나 마카오 양복지 한 벌 또는 쌀 1가마니가 주어졌지만 자축연의 한턱 값이 상품값을 휠씬 능가했다. 서울시내의 당구 붐이 절정을 맞은 48년도 봄 나는 시범 초청을 겸해서 지방 당구계를 순회한 적이 있었고 서울보다 오히려 지방 도시들의 당구열이 높은 데 놀랐다.

원로 당구팬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 시절 각 도시의 대표격 명문 당구장들을 몇 곳 되돌아본다. 그 중에는 지금도 지역 당구계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곳이 있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의 대표 당구장은 왜정 때부터의 동지(同志)당구장이고 그곳의 최고점자는 조성철(趙成喆)씨와 이의선(李宜善)씨로 각각 5백점대 실력이었다. 당구인 이의선(李宜善)씨의 수난일화를 잠시 소개하는 것도 한 시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된다. 그도 한때 당구장을 경영했지만 이는 지난 24년간의 공무원직을 정년퇴직한 연후의 생계 수단이고 그 역시 나처럼 당구를 지독하게 즐겼던 한 사람의 당구인이었다. 5·16 직후 그는 서울 북부세무서에 근무했는데 당구를 잘 친다는 소문 탓에 강원도 묵호로 전출 당해야 했다. 예기인즉 혁명 후 한때 관기숙정(官紀肅正) 바람이 불었고 공직자가 당구장을 출입한다는 것이 인사고과표에 치명타가 됐다는 얘기다. 직속 상관이 그를 면담, 품위(?)를 지켜 당구를 중단하지 않겠느냐, 아니면 지방 전출을 당하겠느냐 양자 택일하라고 으름장을 놓게 되자 강골파인 그는 후자 쪽을 택해 1년 반 동안 억지 타향살이를 감수했던 것이다. 이제는 흘러간 한 시국의 일화겠으나 그의 수난은 우리 당구인으로서는 뼈아픈 일화로 새겨지고 있다.

항도 부산 지방은 국제도시 성격인 만큼 당구장 시설도 일찍부터 전국 제일이었고 이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남포동 일대가 중심지로 초향백홍두 당구장이 쌍벽이었다.

대구는 동지상아당구장, 대전은 역전당구장, 청주는 시민당구장이 발군격이었다. 청주서는 하건홍(河建弘)씨가 3백점대로 지방유지였다. 이 밖에 군산의 군산당구장에서는 이완근(李琓根)씨가 역시 3백점대의 실력을 자랑했고 경기지방에서는 평택의 녹원당구장이 유명해 서울 고점자들의 원정이 잦았다.

그 후 6·25전쟁으로 서울 시내 당구장 대다수가 불탔으며 일부 당구인이 월북했다. 그 대표격이 오랜 전통의 어성당구장(서울역 앞)이다. 당구장은 공산치하의 인민군 거점이 되었고 주인마저 꼭두각시가 돼 북을 택했다. 1·4후퇴 직후의 당구계 무대는 대구, 특히 그 곳의 백홍당구장이 피난 당구인들의 집결장소였다. 나 역시 그 곳을 찾아들렀다가 뜻밖에도 원로당구인 최용(崔鎔)씨의 묘기장사판을 보고 경악했다. 최씨는 과거 일정 때 일본 대표선수로 선발된 적이 있고 한동안은 만주 당구계를 휩쓸며 만주 괴뢰국 황제였던 부의(溥儀)의 개인적 당구선생을 지낸 분이다.

난세를 만나 우선 먹고 사는 게 급선무일 테지만 왕년의 당구왕이 공치기 기술로 관람료를 얻는 데는 연민을 느껴야 했다. 이때 그는 4050여 가지의 묘기공 테크닉을 펼쳤고 이를 구경한 당구팬들은 즉석모금으로 그의 어려운 피난살이를 도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