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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성-2차대전 나자 전시체제 돌입으로 당구도 사양길 본문
조동성-2차대전 나자 전시체제 돌입으로 당구도 사양길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4:18
2차대전 나자 전시체제 돌입으로 당구도 사양길
현지의 선배 당구인인 박수복(朴守福)씨와 함께 봉천(奉天) 시내를 샅샅이 구경한 나는 입학원서의 제출 마감이 임박해서 북경대학을 찾아 나섰다. 기차를 타고 국경지대인 산해관을 통과하면서 느낀 점은 역시 중국은 넓고 크다는 것이었고 큰 물에서 큰 인물이 돼야겠다는 호기가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옛말 그대로 하늘은 무심치가 않았으니 잠시나마 놀이(당구)에 몰두했던 나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신원조회가 도착되지 않은데다 모교의 추천서마저 제대로의 양식을 구비하지 않아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만주에서 도중하차만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재수속을 할 수 있었을 것을 후회막급이었다. 별수 없이 대학문을 되돌아 나올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길로 천진(天津)으로 달려갔다. 당시 천진은 프랑스의 조계권(租界圈)이었고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닿았던 곳이니 기왕지사 시야라도 넓히겠다는 속셈에서였다.
과연 듣던 바 그대로 인종과 국적에 차별이 없는 자유천지였다. 우선 시가지의 건물 모습부터가 완전히 서양식으로 꾸며져 이국정취가 물씬했고 난생 처음 보는 온갖 진품들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오직 당구대였다. 여기서 이틀간 체재하면서 오직 당구장 견학만이 전부였다. 국제도시란 성격답게 이곳의 당구대는 모두 포켓당구대여서 로테이션 게임의 진미를 처음으로 맛보게 됐다.
귀로에 다시 신경(新京)에 내린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철부지의 어리석음 탓이었다. 당초의 상아탑 유학은 딴전인 채 시종 당구 유학 길이 되고 만 것이다. 번화가에 자리한 국옥(菊屋)당구장이 기억에 남는데 때마침 일본의 명수 후지다(藤田)가 시범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큐대만으로 땅바닥의 공을 당구대까지 끌어올린다든지, 맥주병 위의 공을 미동도 없이 때려 맞히는 등의 점프 묘기는 운집한 관중들을 완전히 매료시켰고 일부 돈 많은 호사가들은 즉석에서 찬조금을 뿌리는가 하면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며 사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같이 나의 당구수업도 꽤나 다채롭고 그만큼 광기가 있었다고 봐야겠다. 한 가지 일에 심취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매력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그것이 지독한 아집이 돼 후회도 남길 수가 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얼빠진 중국행이 있은 그 해 말께 전황이 점점 급박해지자 일본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생활 전반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비상 긴축정책이었다.
스포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체의 행사가 금지된 가운데 모든 구기 종목이 동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당구장만은 폐쇄를 면했다. 대신 영업시간을 줄여 하오 5시부터 밤 11시까지의 반나절 장사였다. 이런 조치는 당연히 당구장수를 줄어들게 했고 서울시내의 경우 30여 개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시설이 부족하니 한번 큐를 잡기에도 순번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아마추어들에게는 안치면 그만이겠으나 우리 같은 당구인생들에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기다리진 않았으나 아무튼 각 당구장 앞은 지금의 영화관 앞처럼 열을 지어 서있는 진풍경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당구요금도 시간제 계산 방식이 됐고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승자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게임에 참가한 전원이 요금을 내되 시간에 제한 받지는 않았다.
이 시간제 요금 방식은 당구 본연의 스포츠십을 외면케 한 결정적 원인이 됐다. 훗날 당구장이 사교장이 아닌 유흥장으로 전락된 것도 바로 이 시간제 요금 방식의 출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듬해인 1944년 들어 이미 패전을 피부로 느낀 상황에서 그저 살아간다는 것만이 소중했으니 생활의 유락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나도 학도지원병이 돼 일본 니이가따의 보병사단에 들어간 후 종전까지 생사를 헤맸다.
해방이 돼 그간의 일본 거류민들이 쫓겨감에 따라 당구장도 적산(敵産) 가옥의 하나로서 속속 헐값에 물려졌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이때도 진실된 당구인은 돈이 없어 그저 남의 집 불구경 격이었고 상인들만이 장사속에서 제세상을 만난듯 마구 탐욕을 부렸다. 사실상 이때부터 더 이상 상아공의 기풍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곧이어 미군 진주와 함께 이른바 양풍이 밀려드니 사교장으로서의 당구장은 차츰 빛을 잃기 시작했다. 다방과 술집·댄스교습소가 불어나면서 중심가의 당구장을 마구 잠식, 진고개(明洞)와 종로통의 기존 일류 당구장들이 속속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같이 사양화의 길을 걷는 가운데 해방은 많은 해외 당구인들을 한꺼번에 불러들여 당구인층이나 기술면에서는 점차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됐다. 이때의 해외 출신 당구인사들을 몇 사람 꼽아 보면, 만주에서 온 원로 박수복씨를 비롯해 일본에서 국가대표선수로 묘기공의 일인자였던 최용(崔鎔)씨, 상해파(上海派)로는 김창섭(金昌燮), 김정환(金正煥)씨 등이었다. 이 중 김창섭씨는 당구 외에 훗날 국내 왈츠춤의 왕자로서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같은 상해 출신의 김정환씨는 골프를 국내에 소개한 개척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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