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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성-혜화전문 시절의 당구수업 본문
조동성-혜화전문 시절의 당구수업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5:56
혜화전문 시절의 당구수업
어떤 분야에 남보다 깊이 정통하게 되면 ‘전문가’라고 불린다. 이 호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스포츠 세계에서만은 이 전문가란 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스포츠는 기술보다 정신이 앞서야 하고 그런 마음가짐은 곧 노력과 연습량으로 돋보여지기 때문이다.
당구도 분질이 스포츠십인 이상 이 점은 마찬가지여서 ‘당구인’은 있어도 ‘당구전문가’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당구인’을 ‘당구전문가’로 오인하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른바 고점자들도 결국은 ‘당구인’일 뿐임을 전제하고 나의 당구이력을 잠시 간추려 본다. 이는 나의 얘기이기 전에 그 시대를 살았던 당구인들의 모습을 대신하기 위해서고 한편으로 이것이 고점자 당구인들의 남다른 수업이었던 것 같아서다.
내가 처음 당구장 구경을 하기는 1937년 중학교 1년 때 선친과의 동행에서였다. 무역상을 경영했던 우리집은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때문에 비교적 신식 문물과의 접촉이 쉬웠던 것 같다. 선친의 당구실력은 1백점 내외로 즐긴다기보다는 거래상의 교제출입이 많았다. 그러나 우연히 상아공을 보게 된 나는 그 순간 완전 매료되어 그때부터 단 하루라도 당구대를 보지 못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외동아들이다 보니 다른 아이들보다는 용돈이 비교적 풍족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으나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스러울 만큼 심취한 듯 싶다. 아무튼 날이면 날마다 방과 후면 당구장행이 일과였고 실력이 향상될수록 더욱 묘미를 느껴 시체말로 광(狂)이 됐다. 잠자리에 들면 천장이 당구대로 비치는가 하면, 밥상 앞에선 식기들의 배열이 당구공인양 젓가락으로 각도를 재기에 바빴다. 그뿐이랴. 마침내는 수업시간에도 이따금 당구 생각에 몰두, 급우들의 머리로 꺾임각을 계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당시만 해도 당구장 분위기는 최고의 사교장 그대로였기에 이따금 출입하는 꼬마들을 오히려 귀엽게 여길 정도였다. 사실 나 같은 중학생 당구팬도 적지 않았으며 같은 반에도 서너 명이 단짝을 이루기까지 했다.
5년이 지나 졸업반이 됐을 때 나의 실력은 1백점대(현 3백점) 중상급이 됐는데 그 동안 이미 말했듯이 방용하(方龍河), 이규황(李奎滉)씨 등 선배 당구인들의 지도가 크게 주효했다. 물론 나의 당구장 출입을 집안에선 알고 있었지만, 크게 탓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일에나 집념을 가져야 한다는 가풍 못지않게 그 시대가 당구의 신사도를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꼭 한번은 된통 혼줄이 나야 했는데, 전문학교 입시 결과가 발표되던 날이었다. 당시 내가 지망한 혜화전문 문학부의 경쟁률은 30명 정원에 무려 16대 1이었다. 아무리 당구에 열중했다지만 역시 학생에겐 면학(勉學)이 본분인 이상 나는 공부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니 당구에 뺏긴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남보다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워낙 입시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시험은 잘 치렀으나 합격 여부가 불안스러웠다. 이날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게 되자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격이 될 수밖에. 곧장 당구장으로 달려가서는 그간의 조바심을 흠뻑 씻어냈다. 주인을 상대로 낮 12시부터 큐를 잡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2시가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대문간에 지켜 서 계셨던 선친은 내 덜미를 잡자마자 밤새껏 치도곤이가 되게 매질하셨다. 당구장행보다도 외동아들이, 그것도 합격 발표날에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게 몹시 노여우셨던 것이다.
일단 전문학교생이 되고부터 나의 당구취미는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의 생활 그 자체였다.
당구지우(撞球知友)로서 동문의 최기창(崔基暢)씨를 만나게 된 것도 큰 기쁨이었으며 이후 우리 두 사람은 대학가의 당구를 주름잡았다.
2학년이 되면서 3백점(현 1천점) 정상에 오른 나는 당시로서는 최연소 고점자였다. 4구식 게임에서 최고기술인 세리 당법은 물론이고 특히 3쿠션에선 라이벌이 없었던 것 같다. 사각모 시절의 추억 중에는 각 대학별 대항 경기에서 연전연승, 매번 말술을 대접받던 일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그 당시 대학가라야 경성제대(京城帝大)와 연전(延專), 보전(普專), 치전(齒專), 세브란스 의전(醫專), 그리고 우리 혜전(惠專) 뿐이었지만 학생들의 당구열은 지금보다 오히려 강한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적 게임의 고급 놀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학당구전이 벌어질 때 경기장은 매번 초만원. 응원단도 대단했지만 일반팬들의 관람이 더 많았던 것은 지성인들의 모범경기라는 데 매력을 느꼈다고 봐야겠다. 머리 좋은 경성제대가 유일한 강적이었지만 최기창씨와 나의 커플엔 떡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풍문장(馮文章) 교수(중국어)와의 한판 겨룸이다. 그는 강의를 끝내기만 하면 학생 중에 당구치는 사람이 있는가를 묻곤 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선생의 실력을 묻자 1백 20점(현 3백점대)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생들은 나를 지목해 우리 교실에는 3백점 고수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자 그는 믿기질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 며칠 후 퇴근길에 교수가 예의 당구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1백 20점 실력은 동경 유학 시절의 본바닥 점수였기에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나에게는 적수가 못되었다. 대결이 끝난 후 교수님은 나를 친구 삼아 주점가를 돌았으며 이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좋은 당구인이 되기를 격려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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