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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이야기

조동성-한국인 고점자 방용하의 세리 묘기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8. 00:29

조동성-한국인 고점자 방용하의 세리 묘기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6:43

한국인 고점자 방용하의 세리 묘기

여류당구가족 가쓰라() 자매의 내한 시범 경기는 이후 일본 고점자들의 방한 길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아마다(天田), 후지다(藤田) 등 당대 명수들이 다투어 경성(서울)을 찾아들었고 이들의 수준 높은 기술 당구는 상대적으로 국내 팬들의 시야를 열게 했다.

초창기 한국 당구 발전에 기여했던 분들 (우로부터 조동성, 강두석, 박군실, 조성철, 조봉호, 송준상, 이준구, 권수동 제씨)

일본인들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외래 문화 내지 풍물을 자기 나름대로 건전하게 정착시키는 강한 내셔널리즘이다. 잘 알다시피 바둑만 해도 그 기원은 고대 중국이었으나 이를 기도(棋道)로서 발전시켜 오늘날엔 그 종주국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당시 일본 고점자들이 보여 준 당구정신은 완전히 아마추어리즘의 본보기였다. 때문에 이들의 한국 나들이는 당구기술의 고급화 못지않게 우리 당구가의 건전기풍 조성에 큰 힘이 됐었다. 실로 30년대 중반기의 이때부터 이후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비교적 짧은 기간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 당구사의 가장 멋지고 모범적인 한 세대였다.

풍토가 비옥하면 자연히 열매도 풍성하게 맺게 마련이다. 많은 지도급 당구인들이 이때를 전후해 나타났는데 오늘의 원로당구인 중 대다수도 바로 이 시기에 큐대를 잡았던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명성과 인품을 함께 했던 몇 사람의 고점자들을 소개한다.

이 시기 가장 멋쟁이면서 인텔리층의 당구 명사라면 당시 미쓰꼬시(三越) 백화점의 간부사원이던 방용하(方龍河)씨가 첫 손가락으로 꼽힌다. 해방 후에는 동화백화점 지배인을 지낸 그의 당구실력은 3백점(지금의 1천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 정상이었다. 그러나 점수 이상으로 그의 테크닉의 진면목은 세리(Seri) 기법의 일인자라는 것.

세리 당구란 공은 한데 모아 놓은 채 쿠션을 따라 이동하면서 계속해 득점하는 방법으로 당구기술 중에서도 가장 고도의 기법이다. 이 세리 기법을 마스터하면 일류 중의 일류 당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북 청진이 고향인 그는 북쪽 사람답게 고집스런 기질로 승부욕이 강했다. 특히 일본인과 겨룰라치면 단 한 판도 지지 않아 젊은층들의 우상이었다. 당시 충무로 일대 일인촌의 고점자는 총독부 직원 다까끼(高木)와 하라 변호사가 쌍벽이었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도전했으나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이 방용하씨와 싸워서는 1010, 마침내는 역부족을 자인해 대결을 꺼려했다고 한다. 종로2가 현 YMCA 맞은편에 자리했던 중앙당구장이 그의 무대였고 퇴근 후면 거의 살다시피하며 후배 지도에 전념했다.

60년 초에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초창기 우리 당구 발전의 기둥이었던 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이분에게 가르침을 받은 바 있고 8·15 후에는 서로 대등한 실력에서 격의없이 어울렸던 것이 지금도 선명한 추억이 돼 남아 있다.

이 밖에 박수복(朴守福·일승정구락부 사원), 권재덕(한전 운전기사), 조정일(가방전문상), 배상아(교사), 이택(양복점), 이규황(화가), 박용준(서울연와사장), 홍사철·지윤옥씨 등이 이 시기 경성의 고점자들로 명성을 떨쳤고 지방당구인으로는 대구의 최운영씨, 인천의 조성철씨 등이 모두 3백점대의 정상급들이었다.

이 중 지면관계상 좀 특이했던 세 사람만을 다시 소개하면 먼저 이규황씨로 이분은 메이지대 출신의 미술청년이었다. 그 시대 엘리트로서 귀공자 타입의 그는 당구의 멋을 알아 본 지식인이었다.

나에게 당구를 가르쳐 준 첫 번째 스승이 바로 이분이었다. 치밀 섬세한 테크닉이 절대로 실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전공인 그림보다 당구를 더욱 사랑했던가 싶어 안타까움도 없지 않다.

배상아씨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 배재고보의 교사였다. 현직 교사가 당구장을 출입했다면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한때의 우리 세태와 비교할 때 그 엄청난 의식구조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 시대의 당구장은 결코 지금처럼 유흥장이 될 수 없었고 또 교단을 성직으로 억지 미화시키는 그릇된 인식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윤옥씨인데 그야말로 당구인생의 대표적 인물이다. 전회에 얘기한 바 있는 서린동 소재 홍등당구장의 경영주로 첫발을 디딘 게 17세였다. 이후 화신 옆 동아당구장으로 이사하면서 장안 고점자들의 단골 무대가 되게 했고 그 후에도 스스로 대도시 순회 시범에 나서 당구의 지방 확산을 주도했던 현대 당구의 증인이었다.

다른 당구인들과는 달리 거의 천부적 소질로 일본 최고봉이던 아마다·후지다를 스승으로 한 점도 그만의 자랑이겠다. 그의 특기는 마세(Masse) 기술이었다. 이 기법에선 아직까지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이 지씨와 연관된 사실로서 한때 그는 청와대 직원들의 당구지도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으나 60년대 초 혁명 직후 청와대에도 2대의 당구대가 새로 설치됐다고 한다. 직원들 중에서도 박종규 전경호실장이 2백점대의 발군의 실력이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즐겨 큐대를 잡았는데 대략 150점대의 상당한 실력이었다고 전해진다.

4구 일본선수권자이며 한·일 양국의 당구 발전에 기여한
다까끼 (高木正治 : 한국명 尹春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