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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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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이야기

조동성-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대용품 시대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8. 00:21

조동성-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대용품 시대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3:29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대용품 시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8·15 해방은 순수 우리 힘에 의한 국권 회복이 아니었던 데서 한동안의 혼란상태가 불가피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미군정 기간은 구전통과 새 양풍(洋風)과의 격렬한 싸움판이었고 그것은 모든 면에서 자아가 상실된 단절의 시대였다고도 볼 수 있다.

종래의 사교장이던 당구장이 술집이나 다방, 댄스홀로 변신하는가 하면 상아공 자체가 차츰 그 품위를 잃기 시작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이런 가운데 해방 전까지 30여개에 달했던 서울시내의 당구장수는 불과 1년도 못돼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더욱 서글픈 일은 과거의 당구장(구락부) 주인들은 순수 당구인이었던데 반해 새 경영주들은 장사속의 사업가가 대다수였던 점이다.

그러나 이런 풍토의 변화 이전에 우리 같은 진골 당구팬을 가장 직접적으로 괴롭힌 것은 당구재료난이었다. 이때까지의 당구재료는 모두 일본제였다. 해방과 동시에 수입선이 끊기자 일체의 재료가 동이 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당구장은 있어도 당구대가 없어 큐를 들 수가 없었다. 궁측통(窮則通)이라, 궁하면 통하는 법, 다행히 미군 군수픔이 무진장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서 대용품을 찾게 된 것이다. 깔개인 라사는 미제 담요를 재봉틀로 박아서 대신했다. 팁은 군화의 바닥창을 오려 사용했고 초크는 백묵을 대신했다. 이것마저 입수가 어려워 한동안은 제각기 사용분을 휴대하고 다녔던 적도 있다.

문제는 당구공(상아공)인데 이것만은 대용품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끼고 아껴 사용했지만 몽땅 곰보 투성이가 되었다. 구르는 소리는 마치 자갈밭을 지나는 달구지처럼 요란했다. 아무튼 얼마나 당구용품에 지쳤든지 단골팬이나 고점자가 아니면 처음부터 입장을 기피할 정도였고 당구대 한 대에 큐 한 자루씩이 고작이었다. 이같은 재료난은 한동안 지나 미군 PX를 통한 새 수입 통로가 뚫리면서 완전히 해소됐다.

해방 직후 서울시내 당구장으로서 가장 각광받은 곳은 국민은행 뒤쪽에 자리했던 낭화헌일 것 같다. 원래는 일본인 구락부였으나 한국인이 이를 인수해 장안 고점자들의 당골처가 되었다.

여기에 모였던 얼굴로는 국내 최고의 고점자(5백점)로 동화백화점 지배인이던 방용하씨를 비롯해 원로 박수복씨, 나와 혜화전문 동창생인 최기창, 김명호(金明鎬), 장수복(張壽福), 이한종(李漢鍾)(당시 휘문고 야구 코치), 해외에서 귀국한 김창섭, 김정환, 최용씨 등 모두 당대의 정상 당구인들이었다.

당구대라야 단 3대 뿐이었으니 게임보다는 시국담이 일쑤였고 그런 점에서 이 낭화헌당구장은 우리 당구인들의 사랑방이었다. 특히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이곳에서의 모임에서 앞으로의 국내 당구계의 발전을 위한 토론이 자주 있었던 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부질없는 망상이었으나 그때만은 모두가 진지했음을 밝혀 두고 싶다. 왜냐하면 이런 모임이 우리 당구계에선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낭화헌은 약 1년 후 다방으로 탈바꿈을 해버렸고 명문 당구장으로서 바통을 이어받은 곳이 서울역 앞 어성(御成)이었다. 이때쯤은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당구인들도 제각기 새로운 직장을 찾아나섰는데 나 역시 군정하의 검찰청 공복이 됐다. 그러나 하루 일과가 끝나기가 바쁘게 대개는 당구대 앞에 모여 기량을 겨루면서 우정을 나누는 것이 상례였다. 이 어성당구장에서 홍콩제 플라스틱 공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종래의 상아공보다 한결 가볍게 느껴졌으나 대신 중후한 맛이 없어 고점자들은 상아공쪽을, 플라스틱 공은 초보자들이 많이 애용했다.

1947년 이른 봄 이곳에서 해방 후 최초로 친목당구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약 1백명이 참가해 방용하 선배가 우승, 내가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들어 당구계도 차츰 생기를 되찾으면서 새로운 당구장들이 많이 생겼다. 개업기념의 친선당구대회가 꼬리를 물어 당구팬 홍수의 기폭제가 됐다. 만주에서 온 최용씨가 후배지도를 목적으로 무교당구장을 세운 것을 필두로 소공동에는 대한당구장이 3백점대의 고점자 이춘기(李春基)씨를 지배인으로 맞아 들여 어성의 고점자들을 몽땅 옮겨 받았다.

그 해 11월 충무로 3가의 구 일승정(日勝亭)이 일신정(日新亭)으로 이름을 바꿔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은 훗날 자유당 시절의 국회 부의장이었떤 한희석(韓熙錫)씨였다. 이때만 해도 그는 여느 사업가와 다를 바 없었고 당구실력도 50점대의 초보자 수준이었다. 권력의 날개를 달지 못했던 시절이라 건달패들의 시달림도 받았지만 굵직한 고객들도 많아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무렵 당구인 아닌 당구장 명사가 한 사람 있었으니 주먹왕 김두한(金斗漢)씨였다. 이따금 그가 당구장에 나타나면 특유의 무용담이 쏟아지게 마련이고 그럴 때면 장내가 온통 웃음바다에 빠져들어 공을 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