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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이야기 본문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이야기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0:48
당구야화1
[항일운동 비밀결사 아지트 서울 광교의 무궁헌당구장]
1924년 일본의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임정호씨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광교통 네거리에 무궁헌(無窮軒)이라는 당구장을 개설하였다. 이 한국 최초의 한국인 당구장은 허름한 목조건물 2층에 당구대 2대의 빈약한 시설이었지만, 기품과 격조에선 그때까지의 일인당구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 식민압제하의 억눌린 민족감정은 무엇 하나 왜놈들에게 처질 수가 없었고, 이런 경쟁의식은 일종의 반항 컴플렉스였다고도 하겠다. 우선, 무궁헌이란 이름부터 나라꽃을 상징해 자주의식을 담았던 것이다. 실제 이 무궁헌당구장은 암암리에 학생운동 연락처로서 이용됐다.
초창기의 당구인들은 모두가 상류층의 젊은 엘리트들이었고 당시 엘리트라면 전문대학생이나 동경유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당구장을 비밀 아지트로 삼게 되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구장은 위락시설인만큼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운데다 그만큼 당국의 감시가 약했기 때문이다.
[김효근 종로서에 잡혀 윤치호·유진오씨도 출입]
이때 무궁헌당구장에 자주 얼굴을 비추었던 명사 중에는 윤치호, 유진오 두 분 선생도 끼어 있었다. 물론 당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곳에 나타나는 동창이나 뜻있는 선후배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사실이 들통나서 연락책이었던 김효근씨가 종로서에 잡혀가 약 2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맘때쯤 서울에만 국한돼 그 숫자도 한두개를 헤아리던 순수 한국인 당구장이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무궁헌당구장이 개장된지 1년 후인 1925년께부터였다. 주로 종로 1,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본거지를 이루었는데 동아(2대), 중앙(4대), 테이라(1대) 등이 선두 그룹이었다. 특기할 사실은 포켓당구대가 동아에서 맨처음 설치되어 인기를 모았다는 점이다.
[상업당구장 안착되고 거상·귀족 선호폭 넓어]
차츰 상업당구장이 안착됨에 따라 고객층도 다양해져 사각모의 최고 지식층 외에도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체 등 호상(豪商)들과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도 어울렸는데 이색인물 중에는 이완용과 박영효의 손자도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두 귀공자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150점대의 고점자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구한말 역사의 오점을 찍은 장본인으로 이른바 ‘을사오적’의 으뜸 인물. 그 후 그의 후손이라면 상당한 저항감을 불러 일으킬 만한데도 당자의 인품이 이를 용훼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고 오히려 그 세련된 매너가 주위의 선망을 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초기 보급단계 한인당구장을 즐겨 찾고 게임 품격을 높였던 선배 당구인들의 모습을 꼽아 보면 우선 당구가족이었던 음악가 홍난파씨 일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홍난파 선생은 종로3가에서 바이올린 강습소를 열고 있었고 그 옆에 종로당구장이 자리해 퇴근 후면 대포집을 찾기에 앞서 먼저 큐대부터 잡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고 한다. 선생의 당구 실력은 120점(오늘날의 300점대)이었다.
그런데 친조카인 두 형제가 그에 못지않은 당구팬이었다. 이분들은 모두 의사로서 형 재유씨는 안과, 동생 사유씨는 이비인후과 전문. 지금은 재유씨가 제천에 살고 있어 형제가 떨어져 있으나 당시는 모두 종로통의 명문 개업의였다. 숙부인 난파 선생을 필두로 형제분이 똑같이 당구에 심취해 그야말로 당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재유씨는 셋 중에서도 가장 열성파였던 것 같다. 얼마나 당구를 좋아했던지 아예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간호원이 달려와 밀쳐내야만 마지못해 큐대를 놓았다고 한다.
원로 영화감독 안종화씨와 그 시대의 최고 스크린 액터 나운규씨도 빼지 못할 당구인으로 실력은 각각 60점(현 200점)과 40점의 보통수준이었다. 특히 나운규씨는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당구대에서도 시종 침묵일색이어서 그와 한번 상대한 사람은 그 엄숙함에 질려 다시 어울리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저명당구인과는 달리 순수 당구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고점자들로는 서정원, 김효근씨 등이 있었고 이들의 점수는 3백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점이었다. 참고로 이때 국내 최고점자는 후꾸도꾸 무진회사 사원이었던 일인 다까끼로 그의 점수는 5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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