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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패자는 카운터 앞으로' 당구장마다 걸려있던 친절한 안내판 본문
'패자는 카운터 앞으로' 당구장마다 걸려있던 친절한 안내판
더,오래] 이인근의 당구 오디세이(11)
신문은 지하철과 편의점에서 흔히 팔았지만, 요즘엔 발품을 팔아야 살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해 디지털화되면서 정보를 찾는 방법이 많이 달라진 탓이다. 기술의 진보로 달라진 것은 당구장도 마찬가지다. 당구장에도 디지털 물결이 들어와, 풍경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 [중앙포토]
몇 해 전 어느 전자 회사의 광고가 생각난다. 시장을 보러 온 젊은 남편이 휴대폰으로 생선을 찍어 아내한테 보내 사도 좋은지 물어본다. 생선 파는 할머니가 그게 뭐냐고 묻고 젊은이는 “디지털 세상이잖아요.”라고 답하자 “뭐 돼지털” 하고 반문한다.
얼마 전 내가 쓴 글이 신문 지면에도 나온다고 해 신문을 사려고 동네 편의점을 다 뒤졌는데도 파는 곳이 없었다. 지하철 가판대에서 신문 파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 동네 지하철역으로 가보았으나 가판대가 없어져, 한 정거장을 타고 가서야 간신히 신문을 살 수 있었다.
당구장 웜홀 여행
부지불식간에 세상은 이미 우리에게 별로 익숙하지 않은 온라인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었다. 최근의 과학 기술 발전은 그 속도와 범위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기술 발전의 지향점은 분명 모두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기 위함일 터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리 세대는 더욱 밀려나고 무엇인가 불편해지는 느낌이다. 이럴 때 옛날 시절을 떠올리며 아날로그 감성을 추슬러 보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은 아닐 듯하니 당구장 웜홀 여행을 떠나 보기로 한다.
70, 80년대의 당구장 모습은 지금과 아주 달랐다. 지금이야 당구장도 많이 좋아져 일부 프리미엄급은 아늑한 카페 분위기에다 점수판도 디지털식이고 심지어 테이블마다 CCTV가 설치돼 있어 비디오 판독도 가능하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한 장면. 당구장에서 흡연이 가능한 시절이 있었다. 당구장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일상이라, 테이블에는 담뱃불이 만든 구멍이 송송 나있었다. [사진 네이버 영화]
‘예전의 당구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담배 피우는 모습이다. 지금은 실내 체육시설 금연 지역 지정으로 별도의 격리 흡연실이 있다. 하지만 당시는 말 그대로 담배를 꼬나물고 당구를 치던 시절이었다. 어떤 이는 당구 테이블 레일에다 피우던 담배를 아슬아슬하게 올려놓고 샷을 하고 나선 다시 담배를 주워들곤 했다.
덕분에 웬만한 테이블에는 담뱃불로 생겨난 구멍이 한, 두 개쯤 있는 것은 예사였다. 당구장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불도그가 입에다 시가를 물고 샷을 하는데, 주위에는 친구 개들이 빙 둘러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 말고 사진도 많이 걸려 있었다. 대개가 반라의 금발 미녀가 가슴을 반쯤 내놓은 채 큐를 잡고, 당구 자세치고는 좀 별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미녀는 공이 아닌 정면 향해 고혹적인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런 사진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금발 미녀 사진을 구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한 대학 친구는 “아, 원래 미국에는 저런 아가씨가 당구장에 많아”라며 웃었다. 80년대 중반에 나온 ‘컬러 오브 머니’라는 유명한 당구 영화에 보면 당구장 분위기는 우리와 거의 유사하다. 담배 연기 자욱하다. 다만 여성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장면을 보면 아주 빈말은 아니다.
예전 당구장에는 사진도 많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미녀는 당구 자세치고는 좀 별난 포즈를 취하고 있거나 공이 아닌 정면을 향해 고혹적인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사진 pxhere]
당구장에서는 또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나는 짜장면에 고춧가루를 넣는 것을 좋아해 내가 자주 다니던 당구장 주인아주머니는 아예 고춧가루통을 준비해 놓았다. 당구장에서 시켜 먹는 짜장면은 왜 그리 맛있던지. 지금도 당구장에서 짜장면을 시킬 순 있지만, 예전 같은 맛이 아니다. 우리 입맛이 변했다기보다는 예전보다는 짜장면을 먹기 편안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런 듯하다.
당시에는 휘어진 큐가 많았다. 우리는 당구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큐를 가져와선 테이블 위에다 몇 번씩 굴려 봤다. 당구 치기 전 필요한 의례 절차였다. 큐 팁을 다듬을 때도 소위 ‘야스리(일본말로 줄을 뜻한다. 쇠로 된 물건 등을 거칠게 다듬거나 쓸 거나 할 때 사용하는 도구)’ 라는 연마 기구를 사용했고, 초크를 바를 때도 ‘끼리릭’ 소리를 들으며 구멍이 파이도록 돌려대곤 했다.
요즘 당구장에는 당구 칠 때 사용하는 손 장갑이 비치돼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신 가운데 구멍이 뚫린 흰색 백묵 통이 있어 큐 잡는 손에 땀이 날 적마다 문지르곤 했다. 어떤 당구장에는 야구 투수가 마운드에서 사용하는 로진 백(송진 가루) 비슷한 것을 손뿐 아니라 큐에도 듬뿍 바른 곤 해 한, 두 게임 치고 나면 테이블에는 손자국 모양이 여러 군데 찍혀 있었다.
게임 끝나면 “났어요” 외쳐
학생들은 술집, 당구장에 학생증을 외상담보로 맡기곤 했다. 이런 학생증은 주인이 찾아가지 않아 외판 조직에 흘러가거나, 가짜 대학생의 손에 넘어가는 등 악용되기도 했다. [중앙포토]
70, 80년대의 당구장에는 디지털로 된 시간 표시 기계가 없었다. 요즘에야 당구 승부와 관계없이 얼마씩 갹출해 요금을 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철없고 돈 없던 시절엔 게임비는 철저하게 패자 부담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몇백원 하는 게임비가 없어 학생증이나 교재, 심지어 시계까지 맡기는 친구도 있었다.
따라서 게임 한판이 끝나면 “났어요”를 외쳐야 했는데, 이는 주로 패자의 몫이었다. 게임비 계산에서 다만 몇 푼이라도 아끼려면 게임비를 내야 할 사람이 결과를 서둘러 카운터에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도 어떤 동네 당구장에서는 볼 수 있는 ‘패자는 카운터 앞으로’라는 안내판이 지금은 다소 민망한 느낌을 주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 친구들과 자주 가던 학교 앞 당구장에는 우리 나이 또래의, 얼굴이 넙데데하고 여드름 난, 흰 피부의 새초롬한 처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게임비가 없어 지난 학기의 교재를 맡길 때 모르는 척 받아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처자는 잘살고 있는지.
예전에는 모든 것이 조금은 거칠고, 덜 세련되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아련하게 그립고 아쉬운 것이 있다. 당구장도 마찬가지로 덜 세련되고 부족한 게 많았지만 그래도 짜장면 먹기에 좋았고 게임비가 없어도 각박하게 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당구장에는 철없고, 생각 없고, 잘 난 것 없던 나와 친구들의 치기 어린 모습이 있다. 이제는 먼 곳으로 가 만나기 힘든 친구도 있고, 더 먼 곳으로 가 북망산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우리는 모두 밝게 웃고 있다.
테이블에 있는 흰 점은 공이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를 때의 마찰력이 만든다. 이 점은 오래 세월을 지난 테이블에서 볼 수 있다. [사진 pixabay]
테이블 흰 점, 공과의 마찰력으로 생겨
오래된 당구 테이블에는 무수히 많은 흰 점들이 있다. 특히 테이블 안쪽 가장자리, 즉 고무 쿠션 아래 바닥 면에는 점들로 인해 생긴 흰 선이 빙 둘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에 이런 흰 점은 고수가 맛세를 치면서 큐 끝이 테이블 천에 찍혀 생긴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들 점은 맛세 뿐 아니라 공을 힘껏 칠 때 마찰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공을 힘껏 칠 때 우리 눈에는 공이 바닥 면에 붙어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슬로비디오로 보면 공은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른다. 이때의 마찰력이 테이블 천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다. 고무 쿠션을 따라 흰 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공이 쿠션에 부딪혀 나올 때도 바닥 면에 붙어 구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이블 사용 기간이 오래되면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다.
이인근 전 부림구매(주)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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