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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ano
- 인천 중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 1mm 치과
- uptempo
- jzzz&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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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b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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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st in love "잃어버린 사랑" - 에어서플라이 (air supply)#신포동#ai가사
- 티스토리챌린지
- male base vocal
- new trot. male vocal. 60bpm. piano. cello. orchestra. lyrical. languid.
- 감정의 깊이가 다른 말
- blues&jazz
- y.c.s.정모
- Saxophone
- 70-80bpm
- 인학사무실#참우럭#놀래미#도미#금문고량주#두열#제물포#마장동고깃집#마장동
- male v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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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한국 록(Rock)음악사 본문
한국 록(Rock)음악사
시작하면서
흔히들, 록을 청년문화, 혹은 저항정신과 연결짓는다. 백인의 컨트리와 흑인의 블루스의 결합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록은 일반적으로 여러가지 공유되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보통 한국의 록음악은 듣는 이들이나, 만드는 작자들이나 모두 서구의 그것과는 그 무엇인가가 다르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그 다른 점을 찾기 위하여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한국의 록음악은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떤 길을 갔는지 살펴보는 것이 먼저 선행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경로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여기서는, 전체를 맥락으로서 살펴보는 것보다는, 짤막짤막한 그 시대의 사건들을 나열함으로써 일단 우리 대중가요사 속에서 록음악이 지닌 위치를 단편적으로나마 알아볼 것이다.
한국 록의 기원
한국의 대중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미8군쇼 단체가 생겨난 것은 1956년경이다. 용산에서 분기마다 오디션을 거쳐 미군 주둔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밴드 위주로 주로 컨트리, 스윙, 재즈 등의 스탠다드 팝을 연주하였고, 점점 춤이 섞인 쇼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에서 록큰롤이 주류가 되자, 점점 4인조형태의 록음악 풍의 멤버구성으로 바뀌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미8군쇼는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많은 유명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그 명단으로는 김시스터즈, 김보이즈, 패티김, 이금희, 서수남, 윤복희, 한명숙, 임희숙, 신중현 등이 있다. 이들중, 8군쇼 무대에서 유명한 기타리스트로서는 이인표, 김희갑, 신중현이 있었는데, 이들이 한국에서 록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8군쇼에서도 록과는 별 관련 없이 트로트를 구사하는 가수들도 상당 수 있었는데, 한복남, 박재랑, 이해연, 현인, 이미자등이 유명했다.
이당시 재미있는 현상으로서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충무로와 종로에 등장한 음악감상실은 조영남, 송착식, 윤형주, 김상희 등을 배출시켰다. 음악감상실의 전성시대는 1960~1966년까지로서, 이 때는 전문 오디오기기가 부족하고 비싼 가격때문에, 애호가들이 주로 감상실에 오게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때 미8군쇼의 악단들이 감상실에 서게 되었고, 그 즈음의 비틀즈의 인기는 록음악 유행의 기틀이 되었다.
이 음악 감상실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비슷한 것으로, 80년대에 있었던 뮤직비디오 감상실도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음식점이나, 커피숍을 겸하면서, 당시의 검열에 의해 일반에게 팔리지 못했던 외국의 음반들을 주로 방영해주어서, 싼값에 국내 소개되지 못한 음악을 즐기려는 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신중현의 밴드들
미8군 무대시절부터, ‘재키, 히키, 스코시’란 예명을 가졌고, 1966년 조우커스, 블루즈 테트를 이끌었다. 1968년 덩키즈를 결성했다. 이때는 히피풍의 사이키델릭의 영향력이 느껴지던 시대로서, 당시의 가수들로는 이정화, 김상희, 임희숙, 김추자 등이 있다. 이후 1970년에는 퀘스쳔스, 1971년에는 정성조와 함께 캄보를 결성하였다. 같은해 더 맨을 결성했고, 72년말 유신시대가 되었다. 가장 평가받은 밴드는 ‘엽전’들이다. 처음에는 5인조였으나, 74년 이남이, 김호식과 함께 트리오로 재편했고, 75년 대마초사건전까지 활동했다.
퓨전록?
60년대 말 재즈의 거장 마일즈 데이비스가 록과 퓨전적인 앨범으로 재즈계를 충격으로 몰아넣게 되자, 록의 기본 악기인 기타, 드럼, 베이스에 트럼펫 등의 관악기가 섞인 퓨전록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의 영향은 애니멀즈, 롤링스톤즈, 도어즈 등의 그룹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때 한참 전성기였던 사이키델릭록과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한 미8군 무대를 통하여, 당시의 한국 록음악에도 큰 영향을 준다. 신중현의 음악에도 이 영향이 나타나있다.
골든 그레입스 (Golden Grapes)
6.25로 인한 미군과의 혼혈아들은 사회의 냉대와, 무시속에 상당수가 연예계로 뛰어들었다. 특이한 밴드중에는 이런 상황을 반영한 밴드가 있는데, 여타 그룹과는 달리 멤버가 모두 혼혈아인 골든 그레입스이다. 유명한 멤버들로는 함중아와 윤수일이 있다.
70년대
대마초사건
60년대 미국은 월남전에 패배하고, 당시 젊은이들은 반전사상에 당연히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실천에 옮긴 자들이 소위 ‘히피’이고, 이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하여 약물을 이용하였다. 개국시부터,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한국은, 주한미군에 의해 대마초가 전파되게 되었다. 이는 연예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72년 LAS라는 그룹이 히로뽕 흡입으로 구속되었다. 이휴 군사정권은 75년 12월 대대적 단속으로, 1차로 이종용, 윤형주, 이장희 등이, 2차로 신중현, 김추자, 손학래, 권용남, 박인수, 김정호, 임창제 등이 구속 및 수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77년까지 모두 137명의 연예인이 관계되게 되었고, 한국 록계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대중음악의 질이 저하되는 결과로서 나타났다.
록그룹출신의 가수들
1970년대 한국 록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72년 유신과, 75년의 대마초 파동이다. 72년 유신 이후 군사정권은 록을 퇴폐로 몰아갔고, 72년 대마초파동으로 다수의 가수들이 구속되고, 활동 정지되었다. 이로서 그룹사운드의 대부분이 해체되었고, 여기 출신의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유명 가수들로서는 키보이스 출신의 차중락, 윤항기, 애드 포 출신의 서정길이 있었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조용필이 인기를 끌자 유행이 되었다. 트리퍼스 출신의 김훈, 히 식스의 최헌, 골든 그레입스의 윤수일, 템페스트의 장계현, 양키스의 함중아, 벌떼들의 현철, 최병걸, 조경수 등등.. 이들은 모두 과거 록밴드 출신 가수로서, 70년대 후반은 이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
캠퍼스 록
대마초 사건으로 한국 록계뿐만 아니라 사실상 전체 가요계가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중에 언제나와 같이, 가장 먼저 반발을 한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독재의 압박속에서도 그들만의 울분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록음악을 선택하였다. 이를 ‘캠퍼스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하다고 보여진다.
이를 지켜보던 방송가는 캠퍼스밴드들을 이용하고 방송에 흡수하기 위해서 ‘대학가요제’를 신설한다.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로는 샌드페블즈, 활주로 (배철수가 속해있었다)가 유명하다. 같은무렵 TBC에서도 유사한 해변가요제를 개최해서 블랙테트라(구창모)등이 입상했다.
이런 캠퍼스 밴드의 중심에는 서울대 출신의 산울림이 있었다. 그들은 그 당시 한국록의 대표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만큼 많은 앨범을 발표했고, 인기도 좋았다. 그때의 상황을 감안할때, 그들의 맑고, 소년적인 록은, 대단히 특이한 점이었다.
이 당시의 다른 주목할 만한 밴드로는, 사랑과 평화가 있었다.
이후 배철수와 구창모가 결합되어 송골매를 결성해었는데, 그 전보다 직선적인 느낌의 록을 많이 연주했다. 송골매는 80년대 초 조용필, 이선희와 더불어 당시의 아이돌 스타였다. 송골매의 사운드는, 다른 대중음악가수나, 록밴드와 비교해볼때, 매우 독창적이었고 뛰어났으며, 대중적인 인기도도 높았다.
군사정권의 종말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사정권의 독재가 종말을 고하자, 대마초사건으로 연루되었던 신중현은 ‘뮤직파워’라는 밴드를 이끌고 다시 재기했다.5공정부는, 박정희정권시절에 핍박받았던 그를 무슨 이유에선지, 잘 대해주었고, 그의 신곡 ‘아름다운 강산’은 원래 금지곡이었으나, 건전가요로까지 지위가 상승되었다.
80년대
조용필
70년대는 트로트와 이지리스닝 팝의 주류 대중음악에 포크와 록이 약간의 위치를 차지하는 형국이었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대 히트를 치고 77년 2차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 정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여기서 무릎을 끓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80년 ‘창밖의 여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는 재기에 성공했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매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섞여 있다는 데 있다. 조용필의 음악은, 애수적인 단조 트로트적 멜로디를 록적 연주에 실어서 폭발적으로 부른다는데 그 특이함이 있다. 그의 이런 특징은 다른 가수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신선함과, 익숙함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이런 혼성성과 적당한 대중성으로 그는 단숨에 80년대의 정상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음악을 록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 역시 그 시대의 록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가수중 한 명인 것만은 틀림없다.
헤비메탈
그 전까지는 언더그라운드라 해도 주로 블루스나, 재즈, 혹은 하드록풍의 음악이 대부분인게 우리 대중음악계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무렵 H20, 시나위, 백두산, 부활 등이 등장하면서 헤비메탈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밴드들이 다수 등장했다.메탈밴드의 시초는 80년의 ‘무당’이란 밴드였다.널리 알려진, 시나위는 신중현의아들 신대철이 리더인 밴드로, 당시의 타협적인 록가수들과 달리, 순수한 정통 메탈을 고집했고, 놀랍게도 척박한 한국현실 하에서도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시나위는 그들의 음악뿐만이 아니라, 대단한 인맥으로도 유명하다. 시나위출신의 가수로서는 서태지, 김종서, 임재범, 강기영, 김민기 등이 있다.시나위는 당시에 거의 유통되지 못했던 헤비메탈을 음악계에서 공식화했고, 이후의 인디밴드들의 다양한 장르의 개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
또 다른 밴드로서 유현상이 이끄는 백두산이 유명했다. 유현상은 나중에 트롯가수로 전향했으나, 이때는 상당히 거친 사운드로 알려졌였다. 이승철이 이끄는 부활은 메탈보다는 록발라드쪽을 선호해서, 대중적인 인기는 가장 많았다.
김수철
그는 원래 대학가요제 출신이었고, 그의 데뷔 앨범인 ‘작은거인’과 신체적 특징으로 유명했다. 초기부터 록적인 감수성을 보였고, 80년대를 보내면서 대중가요 스타로서도 유명했다. 그는 하드록에서 퓨전, 영화음악 까지 매우 폭이 넓은 음악인이며, 보컬뿐 아니라 기타리스트로도 유명하다. 그는 산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포크록
70년대 저항적인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한국의 포크는 사실상 순수한 포크라기 보다는 밥딜런의 영향을 받은 포크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들국화가 등장하면서, 포크록이 발전하게 된다.
들국화는 85년 데뷔했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디음악의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들이 TV출연을 거부하고 소극장 라이브로 600여회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후의 ‘동물원’은 이 들국화의 포크록적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판단된다.안치환은 노래운동 출신으로서, 그 시대의 상황을 잘 그려낸 노래들로 주목을 받았다.
처음에는 보다 포크적인 노래들이 많았으나, 이후 점 점 일렉트릭 기타를 주로 사용하는 등 록 적인 냄새가 많이 풍기는 쪽으로 변하였다.강산에는 안치환 보다는 보다 록에 가까운 음향으로 비록 운동권 출신은 아니지만, 그의 비판적 의식은 높이 살만 하다.
또한 그 즈음에 등장한 록가수는 윤도현이 있다. 그는 비판적이기보다는 보다 낙관적인 음색으로 유명하다.
들국화
조동익은 한 때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어떤날’이란 밴드를 했지만, 그는 주로 세션 전문이었다. 그와 관련된 밴드만 해도 들국화, 장필순밴드, 시인과 촌장, 따로 또 같이, 어떤 날, 해바라기 등이 있다.들국화는 전인권과 허성욱이 처음에 같이 연주하다가 최성원을 만나서 트리오로 출발하게 된다. 그들은 방송출연을 거부하고 철저한 라이브 중심으로 팀을 운영했기때문에, 언더그라운드라는 용어가 그들만큼 어울리는 경우는 없었다. 또한 그들이 인기를 끌면서 주무대였던 소극장붐이 일게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들국화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점점 침체기를 겪으며, 주류에서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
봄여름가을겨울
86년 김현식 3집 녹음시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으로 결성된 이 세션 그룹은, 스튜디오 중심의 체제에 염증을 느껴서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기 위한 결과로 생겼다.
대단히 낙관적이며, 경쾌한 리듬을 특색으로 한다.
90년대 이후
1990년대의 록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록과 메탈의 중심지인 미국에서도 이들 장르들은 주춤하기 시작했다.그동안의 천편일률적인 음향과, 곡 전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보여지지만, 아뭏든 이런 침체기 속에서 새로운 장르들이 파생되었다.
‘니르바나(Nirvana)’를 중심으로하는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의 물결이 록신을 강타했고, ‘콘(Korn), 툴(Tool),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등의 강력한 하드코어(Hardcore) 밴드들이 뉴욕을 중심으로 부상했다.
또한 이시기에 급격히 발전된 컴퓨터의 힘을 빌어, 단순히 믹싱(mixing)용 기기로서 사용되었던 수준을 넘어 새로운 장르인 인더스트리얼 록(Industrial rock)이 발전되었다.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게 한국에서도 90년대 이후 록과 메탈은 침체기를 겪었고, 역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적인 취향을 버리지 않은 펑크록(Punk rock)이나, 한국특유의 모던록(Modern rock), 혹은 미국과 비슷한 하드코어 사운드로 그 방향이 바뀌었다.이런 상황에서도 블랙신드롬, 블랙홀, 시나위등은 정통 메탈밴드로서의 명맥을 유지했고, 강력한 스래쉬(Thrash) 메탈을 구사하는 크래쉬(Crash)는 특히 언더신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넥스트
넥스트는 1988년 대학가요제 출신의 신해철이 이후 솔로로 활동하다가 만든 밴드이다.넥스트는 대중성과 실험성을 모두 겸비했다고 평가 받는다.리더인 신해철의 카리즈마와 전 앨범의 컨셉앨범화, 그의 언변등등.. 화제가 많은 밴드였고, 언제나 발라드를 앨범에 포함시켜, 대중성을 잃지 않으려는 약삭빠름도 눈에 띈다.
서태지
앞서 말한대로, 90년대는 세계적으로 록과 메탈의 침체기였다.그래서 다양한 혼성적이고 퓨전적인 장르들이 개발되었고, 한국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1992년 등장한 서태지는 그 전까지의 발라드 중심의 가요계를 단숨에 댄스뮤직화했고, 그동안 변방에서 머물던 10대취향을 주류로 바꿔놓았다.
단순한 댄스뮤직 가수라면 록에 대해 설명하는 이 글에 끼워넣을 필요도 없겠지만, 서태지의 특이한 점은 그가 록밴드 출신이었다는 것이다.그는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연주했었고, 그의 록밴드 시절의 감수성은, 그 당시 주류였던 대중가요적 감수성과는 다른 새로운 면으로 그의 음악에 나타난다.
또한, 그가 비록 댄스뮤직을 활성화 하긴 했지만, 그의 차별성은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1집의 ‘난 알아요’나 2집의 ‘하여가’ 3집의 ‘교실 이데아’ 등은 모두 강력한 록기타의 헤비리프(heavy leap)를 백그라운드에 깔고 있다.
록기타의 리프를 대중가요에 넣은 것은 거의 그가 처음이었고, 소위 한국에서 ‘랩’이라고 불려지는, 힙합적(Hiphop) 코드를 대중음악에 넣은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또한 그리하여, 그때까지 주류대중음악으로서 성공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여러 장르들을 성공적으로 대중화 한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략은 매우 놀라워서, 초기에 비교적 가벼운 음악으로 대중성을 확보한 뒤, 점차 자기만의 음악성을 드러내는 방법을 썼다.
인디(Indie)
인디뮤직은, 80년대 후반, 90년대에 이르러 정통 록 씬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등장한 다양한 장르들과 무관하지 않다.또한 이 시기에 이미 공룡처럼 거대해져 버린 대규모 음반회사들이 대중음악계를 휘어잡는데 대한 반발도 컸다.
일본에서는 소규모 극장과 클럽이 대단히 많이 번창해있었는데, 이에 따라서 다양한 장르의 컬트(Cult)적인 음악들이 많이 발생할 수 있었다.주로 이런 곳에서는 펑크, 하드코어, 힙합 등의 장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홍대 앞의 카페등을 중심으로 몇몇의 클럽이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음악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소리를 만드는 새로운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곳은 당연히 방송과는 거리가 멀고, 라이브 중심의 연주가 관행으로 되었다.이곳 출신의 밴드로는 ‘삐삐밴드, 크라잉 너트, 노브레인, 델리 스파이스, 황신혜밴드, 노이즈 가든, 어어부밴드’ 등 대단히 많은 밴드가 있다.
삐삐밴드
영국의 노동자계급의 문화에서 시작된 펑크는 90년대에 와서야 한국에 나타나게 되었다.주로 홍익대 앞의 카페들과 클럽, 그리고 소수의 지방 클럽에서 활동했다. 당시 등장한 인디밴드 중에 사회에 가장 많이 알려진 밴드는 삐삐 밴드이다.
펑크라는 장르 자체의 특징인, 공격성, 비진지성, 비전문성 등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삐삐밴드는 당시 충격이상이었다. 그들의 공격적인 멘트와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퍼포먼스는 방송금지 조치까지 되기도 했다. 멤버인 강기영 등은 과거 메탈밴드에서 활약한 실력있는 연주자였으나, 삐삐밴드에서의 일탈적 행동과 그 독특함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글을 마치며
분명히, 현재까지의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록음악이 주류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트롯과 발라드의 홍수 속에서도, 상당수의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록을 자신의 주종으로 삼고 그 안에서 음악활동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독재의 압박과, 상업적인 음악의 물결 속에서도, 록은 그 특유의 저항성과 생명력때문에 계속 살아 남았다.
특히 90년대 이후는, 여러가지 사회적 변혁과, 급격한 기술의 발달로 그전에는 생각도 못하였던 새로운 장르들까지 바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의 문제점을 진단하면 꼭 나오는 말이 ‘장르의 편식’이라는 말이다.그 편식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바로 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장르 간의 호불호와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떠나서, 다양한 장르를 파생시키는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록의 영향력은 크다. 글쓴이 : 전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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