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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화혼(魂)은 서호(西湖)에 서리고 / 나혜석과 수원 본문
못다 핀 화혼(魂)은 서호(西湖)에 서리고 / 나혜석과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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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화혼(魂)은 서호(西湖)에 서리고 / 나혜석과 수원
빠리에 체류하고 있는, 고암 이응로 선생의 부인 박인경 여사와 차 한잔을 나누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이화여고 졸업반 때였어요. 안양으로 스케치를 나갔다가 친척이 하던 양로원에 들렀지요. 할머니들이 돌팍에 앉아해를 쪼이고 있는데 저만치 홀로 앉아 있던 40대 여인 한 분을 가리키며 친척이 일러 주셨어요. 저분이 나혜석 씨야. 다가가 인사를 드리자 스케치북을 좀 보여 달라면서, 눈부신 나이로구나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린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 있는 그분이 더 눈부셔 보였어요. 그날 나 여사는 냄새나고 어두운 방한 쪽에서 원고를 찾아내 와서는 손이 떨려 글을 더 못 쓰니 원고 정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빠리 생활을 기록한 글들이었지요. 훗날 빠리에서 생활하면서 문득 그 글들이 떠오르곤 했답니다.”
*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한 사람의 화가이기 전에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나 혜석은 봉건적 가치와 피투성이로 대결했다.
아직도 조선 왕조의 잔영(影)이 서려 있는 장성(長城)의 도시 수원 붉은 해는 '여기산 너머로 지고, 팔달산 낙조가 장엄하다. 길이 6천여 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화성(華城)은 동서남북에 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 등의 4대문을 거느리고 따로 장대포를 쏘는 ‘포루(砲樓)'며 진지인 '포사', 그리고 봉화를 올리는 '봉돈(烽)'을 두고, 인공호수 곁에는 날아갈 듯한 방화수류정(訪花隨柳)'을 세웠다.
화성 옛터를 따라 걷다보면 수원이 단순히 서울을 80리 앞에 둔 외성(外城) 도시가 아닌 또 하나의 '서울'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정조대왕은 비명에 간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현륭원(顯隆園)을 세운 후 직접 화성 축성의 대역사를 독려하며 '작은 서울'을 계획한다. 정조는 현륭원을 찾아 상향(上) 한 후에는 오열하며 수원 행궁으로 귀환하지 않고 재실(齋室)에서 꼬박 밤을 새곤 했다 한다. 영조의 손자이자 그 할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기막힌 운명의 정조는 빼어난 규중 문학인 『한중록』을 지은혜경궁 홍씨의 아들이기도 하여 문기(文氣)가 뛰어났다. 시·서·화에 두루빼어나서 시인이나 서예가, 화가로서도 그 이름이 높았다.
수원성의 이러한 역사적 내력 탓일까. 정조 사후 한 세기만에 수원에서는 증조부가 조선왕조 호조참판을 지낸 왕족 같은 명가(名家)에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인 나혜석(羅蕙錫, 1896~1946)이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뼈저린 슬픔을 당해야 했던 내력마저 닮아 있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의 나혜석의 이름이다. 아직 조선이 캄캄하던 1910 년대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필명을 날렸던 화려한 명성의 그 나혜석만을 기억한다. 구시대적 권위와 인습과 도덕률에 저항하며 실의와 고독 속에 삶의 종장(終章)을 맞았던 또 다른 나혜석에는 무심하거나 무지하다.
* 나혜석, <수원 서호>, 목판에 유채, 30×39cm, 개인 소장. 남쪽에서 밤새워 달려온 열차 소리에 철새가 날아오르곤 하던 서호. 그러나 이 나라 여성으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그녀의 신산스런 생애처럼 서호도 농촌진흥청의 시멘트 담장에 갇혀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낙조의 석양빛을 받으며 '서호'로 간다. 남쪽으로부터 밤새워 달려온 열차가 벌판을 흔들며 가는 소리에 놀라 갈대숲에서 일제히 철새가 날아오르곤 하던 그 서호, 조선시대 옛 이름이 축제 (堤)이던 이 서호는 이젠농촌진흥원 시멘트 담 안에 갇혀 옛 정취를 찾을 수가 없다.
나혜석은 꿈많은 여학교 시절부터 이 호수를 자주 찾곤 했다. 유학으로부터 돌아와서는 푸근하고 너른 이 호수를 바라보며 예술가의 꿈을 좇곤했다. 두 명의 한복 입은 여성이 호숫가에 나들이 나와 있는 그녀의 <수원서호〉를 보면 두 여성 중 하나는 화가 자신임을 짐작케 된다. 서호의 수면 위로 나혜석, 그 화려하면서도 슬픈 반세기 생애가 떠오른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부친이 용인군수를 지낸 명가(名家)에서 태어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의 첫 개인전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안의 내청각(來靑閣))이 몰고 온 경이로운 폭발력을 매일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여성)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 씨의 양화 전람회는…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제2일에는 더욱 많아, 3시까지의 관람자가 무려 4, 5천 명에 달하였더라…
한 사람의 전시회에 4, 5천 명이 몰렸다. 요즘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녀는 외교관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여, 1927년 구라파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또 한 번 세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 당시의 유럽이나 미국은 조선인에겐 풍편(風便)으로나 듣던 피안이었다. 영국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청년 장택상을 조선총독이 마중 나갔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 여성으로서는 선택받은 신데렐라였다. 장장 16개월에 걸친 구미 여행은 벅찬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을 들러 서구미술의 흐름을 숨 가쁘게 체험하고 193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구미유기(歐美遊記)」라는 글로 월간지 『삼천리(三千里)』에 집중적으로 연재한다. 빠리에서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엿보았으며,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밤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미술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거기서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오더라도 변변한 화랑 하나 없던 경성을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했다. 예술가라고는 했지만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가사와 육아문제 등에 있어서 그녀라고 별다른 면책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 김우영만 귀국하고 그녀는 1년 동안 빠리에 남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화가 나혜석의 삶을 영위한다. 이 기간이야말로 완전히 화가 나혜석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리에 홀로 남은 그녀는 몇몇 연구소와 작가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호흡하는데, 특히 야수파 계열의 격정적이고 활달한 필치가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밤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미술가들 속에서 그녀는 무엇보다 서구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그러나 꿈 같은 빠리 체류 동안 중추원 참의 출신에 언론사 사장을 지낸 당대의 명사 최린과의 염문으로 생애의 분수령을 가르게 된다(최린은 호남아(好男兒)였지만 광복 후 친일 문제로 법정에 서기도 한다). 여성의 버선목만 보아도 허벅지를 보았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향한 어제까지의 박수가 비난으로 선망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류화가 나혜석'의 글을 쓴 이명 온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누구의 과오도 아니며 원죄다'라고 역설한다. 이방인 특히 이방 예술가를 정신없이 취하게 만들어버리는 빠리의 분위기가 감성 여린 그녀에게는 덫이었다는 것이다. 빠리에 갈 때마다 몽마르뜨나 몽빠르나스 그리고 생 제르맹 거리의 카페에 앉아 나는 망연히 나혜석의 자취를 더듬곤 했다. 예나 이제나 예술가의 자유혼을 불타게 하는 빠리는 확실히 낭만을 넘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어쨌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녀는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삼천리』지에 저 유명한 '이혼백서'를 쓴다. 그와 함께 사회적 지탄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재기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여 마침내 100여 점이 넘는 작품으로 최후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싸늘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급격하게 황폐해 갔고, 붓을 놓아버린 채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 등지를 전전하며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오른다. 언젠가는 수덕사 견성암으로 승려가 다 된 여류작가 김일엽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때 남편과 아이들은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에미노릇을 못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고 먼발치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송림의 바람소리마저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로 들려 화들짝 놀라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육신은 무너져가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나혜석, 그녀가 간 지 꼭 반세기 만에 반도의 이름없는 화(畵) 학생인 내 앞에 작은 스케치북 한 권이 펼쳐졌다. 장안평 고서점가에서 먼지를 쓰고 있다가 누군가 찾아내어 보관하고 있던 것이 내 앞에까지 흘러온 것이다.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 작은 양피지 스케치북을 들추면서 나는왈칵 육친의 정 같은 것을 느꼈다. 스케치북을 넘길 때마다 그녀의 살갗을 스치는 것 같았다. 문득 나혜석이나 이중섭 같은 파란의 생을 디딤돌로 하여 나 같은 작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투성이로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예(藝)의 길을 닦아놓은 것은 그들이다. 그대로 위를나 같은 시러베는 무임승차하여 굴러온 것이다. 부디 예술가 입네 하고 턱을 쳐들고 다니며 까불지 말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년대 후반 러시아·중국·태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이국풍경을 연필로 그린 그 작은 스케치북에는 한자로 쓴 10여 개의 주소와 조금은 서툴러 보이는 불어로 된 메모 같은 것도 있었다.
정신도 몸도 아름다웠던 시절에 그린 그 작은 그림들과 글씨들 사이로행복의 냄새가 묻어 나왔다. 그러나 그 행복의 페이지들은 너무도 짧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자 폐허의 동인으로도 활동했던 화가이자 문인 나혜석은 확실히 어떤 탁월한 상상력의 소설로도 따라잡기 어려울 만치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예술가였다.
내가 그 나혜석을 처음 알게된 것은 70년대 초반 어느 여성잡지에서였다. 누이가 구독하던 그 잡지에는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발굴하여 기록해간 그녀의 평전이 실리고 있었다. 매달 그 글을 대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 잡지에는 또 한 사람,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뜨 삐아프의 생애가 실려 있었다. 빛나는 재능을 가졌지만 불운했던 두 여인의 이야기를 나는 소중히 스크랩하곤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불운했던 생애 쪽에 더 눈길이 가곤 했던 것일까.
'화첩기행' 이 한두 번 나가고 나서였을 것이다. 내 앞에 다시 자료 묶음 하나가 도착했다. '정월 나혜석 기념사업회'의 유동준(兪東濬, 61) 회장이 평생 모은 나혜석의 자료들 속에서는 그녀의 최후를 기록한 '관보'도 들어있었다. 유 회장은 자식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만큼 나혜석에 열중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해 겨울밤, 산사와 양로원을 떠돌던 반신불수의그녀는 마지막으로 옛 화우 이승만의 집에 들렀다. 거의 폐인의 행색이었다. 그녀는 몰라보게 피폐해 있었다. 육신의 마비와 함께 정신분열 증세까지 겹쳐 있었다. 그 크고 아름답던 눈은 피곤에 찌들 대로 찌들어 총기를 잃고 있었으며 손은 떨고 있었다. 오만하던 미의 여왕의 모습은 간곳없었다. 그녀는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입술을 달싹여 뭐라고 중얼거렸다."자식들이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마른 볼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 2년 후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용산의 한 시립병원(시립자제원(慈濟院) 무연고자 병동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눈부신 봄날 태어나, 춥고 시린 겨울밤 그렇게 스러져간 것이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라고 절규했던 나혜석.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 예원의 꽃은 죽음을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나혜석의 모든 것은 신화처럼 묻혀버렸다. 불과 50년 세월의 안팎에서 모든 것이 지워져 버렸다. 그녀의 생가터인 수원 '나(羅) 참판댁' 도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지도 불명(不明)이다. 심지어 문화체육부(지금의 문화관광부)에서 예술가들의 생가터나 묘지에 세우기 위해 마련한 표석지마저도 수년 동안 수원시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묻고 물어 겨우 화성군 봉담면 어딘가에 그녀의 묘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봉담' 일대를 다 뒤지다시피 했건만 허사였다.
봉담면 이곳저곳을 헤매다 산기슭에 앉아 쉴 때였다. 문득 허공에 당당한 그러면서도 오만한 나혜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젠가 흑백사진에서 본그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 세상 인연을 끊은 지 반세기 후에 자신의 자취를 찾아 헤매는 후학을 나무라는 듯, 귀찮아하는 듯 싸늘한 표정이었다. 나혜석의 초상은 그렇게 잠깐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나는 나혜석 묘소 찾기'를 포기하고 일어섰다. 어쩌면 생애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이 이 선각자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혜석(羅蕙錫)
흔히 우리 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만 알려져 있는 나혜석(1896~1948 (관보 사망기록, 단기 4281년 12월 10일))은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로, 진보적 사회사상가로, 시와 소설과 평론을 쓴 문인으로, 그리고 여권운동가로서도 폭넓은 삶을 살았다. 특히 '조선독립' 에서부터 ‘선전(鮮展) 비평'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과 필력으로 그의 문장은 일세를 풍미했다. 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에서는 그의 미술 업적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1997년부터 해마다 10월에 나혜석 여성미술대전을 열고 있다.
왜 여류서양화가는 드물었을까
1920~40년대에 우리나라의 여류 서양화가는 남성화가들에 비해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빈약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이 새로운 미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구문화를 먼저 수용한 일본을 통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본 유학이 거의 필수과정이다시피 했는데, 당시에 과년한 딸을 일본에 그림 공부를 위해 유학 보낼만한 가정이 흔치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 그림이라면 서도나 서화 공부로 만족해야 했다. 더욱이 유학 가는 여학생이나 여성 예술가에 대한 편견마저 작용하여 본격적 여성 서양화가가 나오기 어려운 풍토였다.
1794년 10월에 준공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동북각루(東北角樓)라고도 하는데, 아름다운 주변 풍광을 지닌 정자이면서 비상시엔 군사지휘소이기도 했다.. 멀리 동 · 서장대(東·西將臺), 장안문 광교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서의 달맞이(龍池待月)는 화성팔경(華城八景) 가운데 하나였다.
# 김 병종의 화첩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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