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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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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야기

곡가(曲家)가 문을 닫았다.

김현관- 그루터기 2023. 12. 3. 02:08

곡가(曲家)가 문을 닫았다.

"아빠! 곡가(曲家)가 문을 닫았어요. 문 앞에 그동안 이용해 주셔서 고맙다고 쓰여 있더군요"

동창들 모임장소를 이야기하는 중에 작은애가 새삼스러운 듯 알려 준다. 작년부터 문을 닫았다 열었다 하더니 사정이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작은애도 친구들과 종종 곡가를 애용했나 보다. 하기사 곡가의 어향가지와 대만식 우육면은 여늬집과는 달리 특별한 감칠맛을 보여 주었으니 누구라도 한 번 맛보면 단골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제 그 맛을 잃게 생겼으니 참으로 아쉽게 되었다.

그동안 몇 번을 찾았으나 갈 때마다 문을 닫아 점차 발길을 놓고 그때마다 풍미와 중화루를 찾다 보니 몇 달 전부터는 아예 모임의 장소가 중화루로 바뀌고 말았다. 이 달만 해도 동창부부동반 모임과 중. 사. 모 송년 모임, Y.C.S동기 송년회등의 모임장소로 중화루를 선택하였으니 곡가의 존재가 더욱 크게 느껴지고 있다.

곡가의 쥔장이자 주방장인 곡 창신선생은  90년대에 연안부두에서 요릿집을 할 때 알고 지냈었는데 사무실에서 너무 멀어  근 30년  소식을 놓고 지내다 친구 명호가 우육면 잘하는 식당이 있다며 소개를 해 준 덕분에 다시 연결이 되어 개인적으로도 자주 찾아 맛을 즐겼으며 친구들 모임 장소로 사랑을 주던 곳이었는데 코로나와 개인 사정이 겹쳐 차츰차츰 문을 닫는 경우가 잦아지더니 이렇게 폐업을 하여 그나마 몇 곳 안 되는 단골집을 하나 잃게 되었다.

내가 나이가 들다 보니 정든 곳들의 주인 분들도 연세가 들어 문을 닫는 곳들이 생기고 코로나로 인해 어느 날 다른 가게로 바뀌거나  영업을 마치는 곳들이 늘었다. 살다 보면 다가오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일 터이다.  남아있는 단골집들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찾아 그나마의 여유를 즐기며 나의 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이고 그 안에서 친구들과 우정을 돈독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한 시간 보내기가 될 것이다. 참 아쉬운 이야기를 들은 날이다.  2023.12.3  그루터기

 

# 아래는 '사라지는 말들'을 집필한 유 종호 님의 청인에 대한 견해의 글이다. 중구에서 20여 년을 근무하다 보니 외지 친구들에게 인천과 중구와 차이나타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어 참고하고자 함께 올려놓는다..

 

청인 / 淸人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나 잠재적 적의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 표출이 문화의 수준에 따라 아주 거칠기도 하고 조금 제어되어 있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경우 중국인을 되놈, 일본인을 왜놈, 미국인을 비롯한 서양인을 양놈이라 부르는 것이 거리의 장삼이사張三李四나 시골의 민초 사이에서는 흔했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우리가 남을 대접해 주어야 우리 자신도 대접받는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암묵적 상호주의의 제1원리이다. 괜한 이방인 배척 감정이나 외국인 혐오감을 갖고 있거나 표출하는 것은 글로벌 시대의 계몽된 민주시민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괜한 외인 배척이나 타인 경계는 우물 안 개구리요 못난이임을 자처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막상 현실에서는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다. 계몽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도 부단한 수양과 수기는 필요하다.

이웃 나라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태도는 정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일본의 대중국 태도를 반영해서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중국인을 '짱코로'로 부르는 것이 예사였다. 중국인의 중국어 발음인 zhonggoren 이 변형되어 일본에서 그리 쓰인 것이다. 그러나 식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청인淸人'이라 했다. 그리고 중식당은 흔히 청요릿집이라 했다.

1930년대 소설을 보면 거의 청요릿집으로 통일되어 있고 1960년대까지 열려 있던 아서원雅敍苑이 그 대표 격이었다. (1925417일에 김약수, 조봉암, 김재봉 등이 모여 조선공산당 중앙집행 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아서원에서였다.) 해방이 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중국이 부상하면서 이제 중국과 중식당으로 통일된 셈이다.

1930년대 말 충북 진천 외곽에서 유년기 몇 해를 보냈다. 집 앞쪽에 중국인이 경작하는 넓은 채소밭이 있었고 동네에서 그 집 채소를 사 먹는 사람들은 그 집을 청인집이라고 불렀다. 청인이란 말은 외국인 하대 감정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 중립적 어사였다. 지금은 사라져 극히 생소하게 들린다. 그러나 어릴 적 처음 익힌 말의 힘은 대단해서 청인이란 말이 그들이 입는 옷을 환기시키면서 실감 나게 들린다.

출처 : 유종호 - 사라지는 말들 / 말과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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