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빛으로 살살 녹는 홍어애, 오이채에 덮여 꼼지락대는 낙지탕탕이, 윤기 자르르 흐르는 홍어회, 푸짐하고 보들보들한 낙지찜, 양념 맛까지 착 감긴 낙지무침. 그리고 아직은 홍어 손질이 미숙해서인지 뼈 발라내는 솜씨는 조금 서툴지만, 그래서 오히려 살이 넉넉하게 살아 있는 홍어찌개까지. 한 상이 그야말로 성찬이다.
이 모든 건 오늘의 주인공, 인학씨 덕분이다. 대청도에서 공수한 낙지와 홍어를 혼자서 재료 장만하고 손질하고 좌석까지 마련하느라 땀 좀 흘렸을 텐데, 힘든 내색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에 더 신이 난 눈치다. 인학씨 같은 친구 하나 있으면, 인생의 먹복은 다 가진 셈이다.
오늘도 그렇다. 덕분에 이 맛있는 음식 앞에서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잔을 주고받는 인학씨와 호경 형님, 승희, 명호, 승룡이, 그리고 나. 언제 봐도 반갑고, 언제 어울려도 편한 사람들. 오랜 친구들과 이렇게 틈틈이 모여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한 분, 천냥집 여사장님. 송림동로터리 근처 조용한 골목 어귀에 자리한 조촐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곳. 여사장님의 손맛은 정말 기가 막히다. 오늘도 인학씨가 손질한 재료들로 끓이고 무치고 요리한 일등공신이다. 나물 하나, 무침 하나, 그냥 내놓는 법이 없다. 곁반찬만으로도 술 한 병은 거뜬히 비울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고급요릿집 못지않은 맛을 이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게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백수 생활 중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돈보다 더 중요한 건 맛과 정,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 아니겠나.하지만 오늘 같은 자리는 또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낙지와 홍어의 철이 이제 막바지다. 당분간 이 진귀한 재료들이 자취를 감출 거라 생각하니, 젓가락도, 술잔도 천천히 움직인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맛은 더 짙고, 오늘의 시간은 더 따뜻하다.
두어 달만 지나면 다시 낙지와 홍어를 제대로 맛 볼 철이 돌아올 테고, 그때 또 우리는 인학씨의 수고로움을 빙자하여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때도 오늘처럼, 웃으며 잔을 부딪치고, 누가 더 잘 먹었나 농담을 주고받고, 인학씨는 또 말없이 이것저것 챙기고 있겠지. 그 전에 내가 좋아하는 생물밴댕이를 먹으러 다시 찾아야겠다.
참석 못한 친구들… 글쎄, 이 이야기 들으면 아마 배 아파 굴러다닐 걸.... 그래서 일부러라도 더 자세히, 더 맛있게 자랑하고 싶어진다.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우리가 이긴 거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걸 나누는 이 밤이, 참 다행이다. 이게 뭐라고, 자꾸만 마음이 따뜻해지누.. 2025.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