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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본문

인천풍경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29. 16:01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인천에는 세가지의 100 주년 기념탑이 있다. 자유공원에 있는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 지금은 없어진 "연안부두 입구의 (개항100주년 기념탑"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의 세가지가 있다.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외진곳에 있어 모르는 인천시민들이 꽤 많을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월미도 가는 길가에 위치한 탓에 쉽게 보이지도 않는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1885년 4월5일. 거친 조선의 바다를 바라보는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은둔의 땅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건 항해 끝에 제물포 입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이 땅에서 벌어질 어떤 어려움도 주님이 주시는 용기와 인내로 이겨내리라’고 다짐했다. 또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온 한 명은 하루빨리 조선에 도착해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일행은 미국 북감리회에서 파송된 헨리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로회가 파송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구름이 잔뜩 낀 제물포의 하늘은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마중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이들의 제물포 상륙은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의 시작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미지의 땅에 입을 맞추며 이 땅에 복음의 빛이 전해지길 바라는 기도를 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부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하오니 어둠 속에서 억압 받고 있는 이 한국 백성에게 밝은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소서.”

121년전 그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주일 오후 3시께였다.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기록되는 이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인천 중구 중앙동1가 18. 인천항이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에 ‘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을 타고 인천역에 내리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탑은 한국 교계가 1986년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내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다. 약 50평의 대지 위에 17m 높이로 세워졌으며,높이 2.7m의 3인 청동상,3개의 탑신,6면의 부조 및 원형의 석조 계단으로 구성돼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표현한 3인의 청동상 밑엔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 드렸던 기도문이 새겨져 있어 선교 121년을 맞은 우리에게 가르침과 도전 정신을 준다.

당시 조선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서서히 문호가 개방됐다. 이때 전도의 문이 열리면서 입국을 처음 시도했던 사람들은 일본에 주재하던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 이수정 등을 통해 한국 실정을 파악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갓 결혼한 27세의 새신랑이었다. 한국에 오기 2년전 미국 하트포트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연맹집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만났고 이 집회를 계기로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됐다. 두 사람의 친분관계로 후일 한국에서의 장로교,감리교 양 교파의 선교구역 분할도 큰 마찰이 없이 추진됐다.

이 3명의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 조선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지 채 4개월밖에 되지 않아 정세는 불안했다. 특히 외국인 여성의 입국은 위험했다. 단신으로 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4년 서울로 와 고종의 어의 겸 주한 미국공사를 맡았으며 광혜원을 운영하던 앨런의 집에서 머물렀으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이들은 인천에서 1주일간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20일 재입항했다. 그러나 이때도 입경하지 못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 내리에 초가집을 빌려 38일간 머무르며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선교를 구상했다. 그해 7월7일 증기선으로 오르간이 도착했다. 이때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린 것이 인천에서의 첫 공식예배로 기록된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7월19일 입경하기 전까지 인천 내리에 머물고 있을 때 직?간접적인 선교사역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1885년 4월5일부터,또는 6월20일부터 뿌려진 제물포 선교의 씨앗이 장차 내리교회라는 제도적 교회로 자라게 된 모태로 보고 있다. 즉 아펜젤러 선교사의 눈물어린 기도의 씨앗으로 내리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인천 중구 내동에 있는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당 설립,한국 최초의 엡윗청년회 조직,초대교인 김기범 목사의 한국 최초의 목사안수 등의 기록을 갖고 있는 한국의 어머니 교회이다. 내리교회를 방문하면 아펜젤러 선교사 흉상과 1901년에 만들어진 종,내리역사전시관 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