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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눈(雪)을 보는 마음 본문
눈(雪)을 보는 마음
시베리아의 차가운 공기층이 한 달여간 이 나라를 차가운 얼음나라로 만들었다. 한강도 얼고, 물이 깊어 짙푸른 동해바다의 추암 “촛대바위”도 얼음에 갇히고, “장봉도”로 가는 “삼목 선착장” 앞바다는 얼음 바위들이 떠 다니는데, 하늘도 미안한지 그 위에 하얀 눈을 덮어 놓았다. 자연의 심술은 사람들에게는 고난의 시작이다, 올 겨울은 “삼한사온”이 주는 잠시의 여유마저도 “삼한 사냉”이라는 표현을 주던 친구의 농담마저도 얼게 만들었다,
어제와는 다른 낯섦이 주는 하얀 풍경이다. 살아오며 수 없이 보아 온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틀리니, 사람의 감성이란 믿을 바 못된다. 내가 나의 감성을 모르는데, 다른 이는 더더욱 나를 모를 것이 틀림없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시리도록 하얗고 검불처럼 나불대던 눈송이들이 온 천지간을 하얗게 덮고 있다.
유년시절! 어려운 살림으로 인해 잠시 외가댁에 맡겨진 그 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햇살이 눈을 뜨던 시간 , 느닷없는 尿氣에 덜 깬 눈을 비비며 송진이 말라붙은 쪽문을 밀고 앞마당에 나섰다. 한 손은 부샅에 있는데 이내 동그랗게 커진 눈앞으로, 햇살이 깨지며 청명하고 영롱한 보석 가루를 머금은 채 믿을 수 없이 하얀 눈 천지가 다가왔다. 조그만 가슴에 다가온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흰색이 주는 신비에 넋을 잃고 두 손 흔들며 눈 마중을 나갔던 기억의 편린이 떠오른다. 그날 이후! 눈 이 주는 그런 벅찬 감동은 다시금 내게 다가오지 않고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하얀 세상이다. 넓은 운동장 한 귀퉁이에 누가 만들어 던졌는지 주먹만 한 눈 덩어리 하나 굴린 흔적 보이는데 발자국은 없다. 인적 드문 곳이라 저대로 조금씩 조금씩 녹아 하늘로 되돌아갈 듯하다.
예전 눈 온 날이면 대문 앞에 웃고 서 있는 눈 사람들 숫자만큼 식구 수도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눈 사람을 만들면 신문에 실리는 세상이다. 도시 아이들은 눈 사람을 못 만든다, 아니 안 만든다고 해야 마땅하다. 어른들이 뿌려놓은 공해가 흰 눈으로 꿈을 뭉치는 유년시절의 아름다움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음 따라 눈도 달리 보인다. 편안하게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정원에 소담스레 쌓인 눈을 바라보는 느긋한 마음도 있고,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서서 온 몸으로 내리는 눈을 받아먹는 동심도 있으며, 사랑 가득 담아 눈을 흩뿌리는 연인들의 벙어리장갑에 엉켜있는 소담스러운 마음도 있을 테지만, 서까래 들고 한숨짓는 늙은 경비 아저씨의 푸념 서린 마음과, 새벽녘 흩날리는 눈 발에 염화칼슘 뿌리는 제설작업 인부와, 눈 구덩이에 파묻혀 헛도는 차바퀴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대한 마음들은 같을 수 없다,
천지를 덮은 하얀 눈에서 인간의 원죄를 다룬 내용으로 종말 부분에 “시오가리 고개”의 설경을 떠 오르게 하는 일본 소설 "빙점"을 떠 올리고 , 낡은 사진 속에서도 과거를 끄집어낸다. 한 겨울의 송도 유원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저 여인은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가? 사라진 “계림극장” 간판에 그려진,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 이야기 "러브 스토리"의 눈싸움 장면에는, 진고동색 코트를 입은 “라이언 오닐”와 "알리 맥그로우"가 보인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배경으로 “앤서니 퀸”을 뒤쫓는 “말콤 맥도웰”의 날 선 눈빛이 유독 기억에 남던 영화 "페세이지"의 장엄한 설경이 주는 시린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이렇듯 흰 눈 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뭉근한 온기로 남아 있음은 아직 내게도 젊은 시절의 푸릇한 감성이 조금이라도 자리하고 있음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멀리서 제설차량의 특유의 사이렌 소리가 다가온다.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던 내 감성은 어느새 현실로 돌아온다. 스치듯 창 밖을 지나는 제설차의 꽁무니에서 눈덩이들의 아우성이 보이는데, 칼바람은 불어, 햇살 받은 대지는 가쁜 숨을 쉬고, 아스팔트 위에는 쉼 없이 반짝이는 눈물이 흐른다.
2011 ‒ 1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