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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포천 가는 길 본문
포천 가는 길
언제부터인지 불현듯 지난 세월 중에 한 곳이 명징하게 되새겨질 때가 있다. 그것은 망각의 구덩이에 안개구름처럼 불투명하게 쌓여 침잠한 상태로 은둔 중에 있지만 우연이라는 뇌관을 건드리면 살포시 드러났다 서서히 사라진다. 바로 그 짧은 시간 강렬한 주파수가 생성되며 옛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흐르고 잠시 상념에 젖는다.
상념 중에는 대체적으로 천둥벌거숭이 시절의 기억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아이들에게 아비의 어린 시절을 들려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추억거리로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다 근간에 이런 일들이 간혹 일어나는 것은 아마도 지난 세월을 기억해 내고자 하는 애씀을 궁휼히 여기는 님께서 잠시 과거를 반추해 볼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주신 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이 얘기는 그중의 하나다..
어제 미국에 있는 은찬이로부터 안부 메일을 받았다. 지난해 기적적으로 만나, 30년 동안 묵은 회포를 풀었던 친구이다. 인터넷에서 가평 별장 주소를 입력했는데 내가 쓴 자기 얘기가 머리글로 떴다고 맥없이 좋아하더니 직장에 매인 내 사정은 아랑곳없이 올여름에 한국에 올 테니 작년에 시간이 없어 못 가본 전국일주를 꼭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한다.
좋기도 하고, 내심 부담도 가기는 하지만 친구가 오면 어찌 시간을 내 볼 요량으로 답장을 보내던 중에 지난날 그 친구와 함께 치기 어린 장난질을 하며 키득대던 포천에 사는 또 다른 한 친구가 떠 올랐다. 큰아들 녀석도 포천에서 군생활을 하였고, 처 이모님 댁 역시 포천과 맞붙은 철원이어서 포천이라는 지명에 대해 별 의식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이상하게도 어제 그 시간에는 그 친구와 더불어 포천이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에 와 걸치길래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던 순간 뿌연 안갯속에 가려졌던 어린 시절의 한 지점이 선연하게 떠 올랐다.
7살 여름! 비 온 뒤끝이라 습한 공기가 온 집안을 눅눅하게 뒤덮은 어느 날이었다. 툇마루에서 개다리소반에 노란 좁쌀죽 한 보시기 담아 막 한 술 뜨던 중에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로 단장을 하고 쪽진 머리를 동백기름으로 자르르하게 멋을 낸 할머니께서 대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내 평생 통틀어 완벽하게 내편이 돼 주셨던 단 한 분! 할머니께서는 포천에 사시는 이모할머니 잔치에 나를 데리고 가시고자 수원에서 오셨다. 그날. 새 옷, 새 모자, 새 운동화까지 사 주시면서 평소에는 비싸서 먹어 볼 엄두도 못 내던 로즈 빵과 전병과자에다 사이다까지 사주시는 바람에 마치 생일맞이 하는 것처럼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새벽! 동마장 터미널에서 포천행 버스를 탔다. 이모 할머님 댁 가는 길이 7살 배기 어린아이의 걸음에 천리길이요 만리길인지를 그때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또 하나 산골에 사는 생명들이 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동화되어 그네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는 신천지가 반겨 주리라는 것 역시 몰랐다.
가라랑 거리는 낡은 버스의 숨소리는 턱에 걸리고, 꽁무니에서 내뿜는 노랑 먼지구름들과 시커먼 매연 덩어리들이 계속 뒤쫓아 오고 있었다. 지금처럼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없이 달궈진 차 안은 복더위에 난로를 켜 놓은 듯 온몸을 땀으로 적시는데도 할머니는 단정하게 앉아 이따금씩 내 콧등에 솟은 땀방울을 콕콕 찍어 내셨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기만 했는데도 하얀색 타이즈는 노랑 먼지와 거뭇한 매연 가루로 얼룩덜룩 더러워지고 있었다.
포천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점심때가 되어 시장 근처의 중국식당에서 생전 처음 짜장면을 먹었다. 세상에 ~ 어째 그런 맛이 있을까! 할머니는 새로운 맛의 세계를 어린 손자한테 열어 주셨다. 나중에야 까만 음식이 짜장면인 줄 알았고 너무 어려서 그때 먹던 짜장면의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함께 탁자 위에 놓였던 단무지 그릇 안에 번진 맑은 노랑물과 새로운 음식에 놀랐던 그 느낌만이 아스라이 남아있다.
여름 햇살은 바늘처럼 온몸을 찌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한다. 철부지야 감각을 제대로 느끼질 못했을 텐데 할머니는 그 더위에도 그저 미소 지으며 손자를 다독여 가는 길을 재촉하였다. 읍내를 벗어 나자 이내 초록빛 향연이 펼쳐지면서 온갖 곤충들과 발길을 멈추게 하는 시냇물과 그리고 높고 낮은 수 없는 고갯길을 넘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싱그런 풀냄새와 나뭇잎의 살랑거림과 산바람이 주는 상쾌함에 천방지축으로 까불대다 몇 개의 산등성이와 고개를 넘으며 서서히 칭얼거림의 횟수가 늘어나자 할머니는 어린 눈에는 보이지 않던 숨어 있는 조그만 풀벌레들을 아무런 힘도 안 들이며 척척 손으로 잡아 손주에게 내밀었고 잠자리와 풍뎅이와 방아깨비, 여치들을 조그만 풀집에 엮어 넣어 주시며 손주를 달래 주셨다. 풀집 안에서 파득이는 곤충들의 짓거리에 혼이 팔리고 매미소리에 정신을 빼앗기며 그렇게 그렇게 산모롱이도 돌고, 고개도 넘고, 성황당 그늘에서 땀도 훔쳐 가면서 할머니와 손주는 타박타박 산길을 걸었다..
어느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고 있었다. 지금 눈으로 보면 아주 조촐한 초상 치레였다. 상두꾼들의 상여 노랫소리와 상주들의 애잔한 곡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맘에까지 와닿았다. 의식의 경건함과 상여 뒤에 늘어 선 상주들의 슬픈 표정에서 그리고 곡소리의 가락이 주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겁에 질린 채 조심조심 행렬을 지켜보며 그 마을을 벗어났다.
상여행렬로 놀란 손주를 달래려 할머니께서 시냇가에서 조그만 바윗돌을 뒤집어 지붕이 달아나 혼비백산 움찔대는 가재를 보여 주었다 신기한 마음에 잡아들다 그만 가재의 앞발에 호되게 손가락을 물리고 엉엉 대는 손주를 보며 모처럼 할머니께서 박장대소를 하셨는데 그때 처음 할머니를 향한 미운 감정이 들었다.
자박자박 걷는 오솔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람쥐들이 눈을 맞추며 주위를 알짱거린다. 손을 내밀면 도망가고 가만히 걷고 있으면 다가오던 다람쥐들의 등줄이 너무도 선명하게 눈에 와닿는다. 아주 긴 걸음으로 도착한 이모할머니 집은 산골이라 일찍 해가 진 탓인지 이미 땅거미가 깊게 내려앉아 집의 형태도 채 안보였고, 어둑한 방안에 들어서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할머니 무릎을 베고 쏟아지는 잠을 청했다.
그날은 포천의 산골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자연과 하나 되는 날이었으며, 그렇게 한 걸음 멀고 먼 세상의 여행길에 첫발 을 딛던 날이기도 하였다. 어느 순간 우연히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으로 지난 세월을 끄집어내는 우연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 다른 세월의 고리를 찾으러 기억의 골목을 여행할 것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형태로 포장된 추억을 헤집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추억을 탐하는 내게 매 순간 과거로 흘려보내는 오늘을 진지하게 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스스
로를 격려하며 지내리라.
2011 ‒ 3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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