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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홍예문에 흐르는 기억들 본문

내이야기

홍예문에 흐르는 기억들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3. 20:58

홍예문에 흐르는 기억들

자유공원길을 오르는데 홍예문의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이제는 시원한 골바람과 함께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홍예문을 보기 힘들게 되었다. 담쟁이넝쿨로 인해 석축이 벌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며 그 뿌리들을 제거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한 여름! 홍예문위에서 낙조를 배경으로 붉게 물든 인천항을 바라보다 바로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자 담쟁이넝쿨의 살랑임과 내려다 보이는 석축들의 속살이 언뜻언뜻 일렁이며 마치 살진 여인네의 은밀하면서 거대한 사타구니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주 농염한 자태를 보이며 시야를 가득 채운 홍예문의 자극적인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

이런 자극적인 모습은 나만 본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증거가 하나 있다. 고 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보면 해방 후 송 건영이라는 청년이 영화에서 본 것을 흉내 내느라 우산을 쓰고 뛰어내렸다 하는데 이 청년도 내가 본 여인네의 선정적인 자태에 빠져 정신을 잃고 뛰어내린 것이 틀림없다. 나 역시 해살거리는 홍예문의 짓거리에 취해 그 정염 속에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니 송 씨와 나는 세대를 건너뛴 이심전심으로 홍예문에게서 에로티시즘을 느낀 게 아닌가 싶다. [완전 억지 추측인 것은 알고 있다.]

지금은 홍예문 어깨 위에 걸터앉아 과거를 기억한다.

87년 홍예문 근처에서 생활하던 당시 홍예문 옆에 신 태범 박사님에게 살고 계셨다. 조금이라도 인천에 대한 관심이 있었더라면, 신 박사님의 존재를 알았을 테고 근처에 지천으로 널린 오래된 건물과 개항기의 생생한 역사를 매일이라도 찾아뵈며 들었을 텐데, 아둔하고 멍청하여 그 좋은 기회를 그저 흘려버린 그때가 너무 아쉽다.

한 여름날! 땀 뻘뻘 흘리며 소식을 전하러 공원 매점을 찾은 내게 아이스크림 하나 꺼내 입에 물려주며 인자한 미소를 짓던 노인회장님의 자취는 스러졌지만 그분의 영혼은 지난 세월의 흔적도 유려하게 살아있음을 되돌아볼 수 있게 나를 일깨워 준다. 매점 옆 '사랑의 종탑'은 녹슬어 기름진 목청을 잃었어도 그 옛날 화려한 밤의 임무를 반추하면서 도도하게 인천항을 내려다볼 수 있듯이..

경찰청장 관사 앞! 조그맣고 낡은 2층 건물 아래 지금은 사라진 서린 다방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 옆에 노란색 펌프가 하나 있다. 동네 유지 몇 분의 도움을 받아 민방위 시설물로 설치했는데, 마중물 한 바가지면 시원한 물이 소담스레 쏟아져 동네 주민들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다고 스스로 흐뭇했는데 지금도 잘 있는지 한 번 다녀와야겠다.

중구청 앞 "바그다드 카페"의 옛 건물 지하에 "장미 다방"이 있었다. 빨간 보자기에 보온병과 투박한 커피잔을 넣어 질끈 동여매고 배달을 다니던, 레지들의 싱싱한 걸음걸이가 새삼 그려진다. 그 아래에는 "금마차 다방"이 있었고, 맞은편 길 "인천 보이스카우트 연맹" 건물 앞에 "삼화 다방"이 지금도 그 동네 다방문화의 명맥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며칠 전 신문기사를 보니 파고다 공원에서 소일하던 노인들이 공원을 떠나 멋진 카페로 이동하여 여가를 즐기는 실버족들이 늘고 있다는데, 예전 다방문화가 세월의 변화에 부응하듯 서서히 고급화되어 가는가 보다.

조계지 계단 방향 "관동교회" 옆 조그만 골목길 끄트머리에서 밀주를 팔던 집이 있었다. 돌아가신 술친구 차 영현 씨와 막걸리 한 되를 기본으로 마시며 흥에 취해 신포동 거리를 활보하던 날들이 기억에 삼삼하다. 간경화로 병원에 입원했으면서도 베갯머리에 소주를 챙겨 놓고 마시던 철없는 차선배의 선한 눈자위에 비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라진 과거가 되어버린 옛 기억들은 점점 뇌리에서 희미해진다

가을 어느 날 떨어지는 낙엽을 고이 받아 놓은 정원이 아름다워 찾던 금강제화 위의 조그만 카페와 세상의 혼돈을 처음으로 맛 본 경찰청장 관사 앞의 요정 "인천원, 노처녀 김 간호사의 은밀한 추파가 싫지 않던 마사회 앞 "후생병원과 아주 외진 장소에 오픈을 했지만 실내 장식이 멋지고 분위기가 좋아 간혹 흑맥주를 찾아 마시던 "카이저 호프"와 살을 잘게 찢어 넣은 말간 소고깃국과 가마솥 콩밥으로 구수한 정을 지어주던 "동방 식당"할머니의 깊게 파인 주름살도 그립고, 생선찌개가 일품이던 "춘천 식당" 아줌마의 잔잔한 미소도 한껏 그립다.

성공회 아래 “이당 기념관”의 하얀 목련의 시린 모습이 눈길을 스쳐 흐르고, 중화루의 퇴락한 모습은 안타까이 머릿속을 휘돈다. 그나마 지금껏 버티며 "후루다 양품점"의 자취를 안고 있는 "버텀라인"카페에서 "Julie Londond"의 노래를 가슴으로 느끼며 술 한잔에 애틋한 세월을 담다 보니 새삼 홍예문과 함께 지내던 젊은 시절의 한때마저 그리움에 저민다.

2011 - 3 - 27 

*홍예문
문틀 윗머리가 무지개 모양으로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은 개항 당시 인천항과 인접
한 중앙동과 관동 등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전동과 만석동으로 자국의 조계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조성한 수탈
의 역사를 지닌 가슴 아픈 축조물이다.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13m의 홍예문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5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다. 같은 무렵에 축조한 "긴 담 모퉁이"와 함께 그들의 토목기술
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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