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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그리고 신포동 - 김윤식 /2003년 소회 본문
'사람과 사람' 그리고 신포동 - 김윤식 / 시인·인천문인협회장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신포동에는 사람도 없고 술집도 없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건방지다며 불쾌감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요, 또 얼핏 모욕감 같은 느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 표현한다. 어차피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술하는 사람들과 예술하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몇몇 술집이 사라져 없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손설향(孫雪鄕) 시인이 마지막이었는지, 아니면 한국화를 하던 우문국(禹文國) 선생의 발걸음이 마지막이었는지 모르겠다. 생전에 그렇게도 신포동과 약주를 사랑하던 그분들의 뒷모습을 끝으로 신포동은 정녕 주인을 잃고, 사람을 잃었다. 그리고 문화를 잃어 버렸다.
물론 딱 두 사람, 서예에 몰두하고 있는(이 분은 세상에 한 번도 붓으로써 자신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 김인홍(金麟弘) 선생과 서양화가 정순일(鄭淳日)화백이 한 주일에 한 번 아주 잠깐씩, 그나마 아직 가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신포주점에 나온다. 그 외에 누가 있을까. 누가 이 약주를 마시러, 누가 반세기 인천 문화의 체온을 느끼러 신포동에 나올까.
신포동 문화의 마지막 명운이 다한 때는 대략 1980년대 말쯤이리라. 조금 길게 잡으면 90년대 초까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몸이 많이 축가기는 했어도 손설향 시인이 드문드문 신포시장골목을 출입했고, 랑승만(浪承萬) 시인이 불편한 몸으로 가끔 목노에 앉았었다. 장년층으로는 아동문학을 하는 김구연, 다방면에 걸쳐 재주를 보이는 김학균(金學) 등이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김(金) 모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세월이 변하면 집도 사람도 다 바뀌는 법이다. 인천에서 가장 누추한 선술집이면서도 매일 낮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인천 문화의 가장 은성한 시절을 누렸던 백항아리집. 카바이트 불빛처럼 꺼져버린 그 집의 퇴장이 신포동의 몰락을 불렀는지 모른다. 주안으로 남동구로 부평으로 발전해 가는 인천의 앞날을 백항아리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꿰뚫어본 것일까. 그래서 하릴없이 이 집도 문을 닫은 것이다.
말년, 상징과 익살과 광기를 지독스럽게 온몸으로 표출했던 최병구(崔炳九) 시인의 뼛가루가 백항아리문지방과 신포주점, 마냥집 등지에 뿌려진 것을 아는 사람은 이제 몇이나 이 세상에 남아 있을까. 그가 신포 시장에 들어서면 시장 길가에서 조개를 까던 여인들이 짓궂은 그의 장난을 피해 모조리 돌아앉던 일을 기억하는 문인이 있을까.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에서 내려와 홀로 술잔을 들던 “아아, 정주성(定州城)” 의 박 송(朴 松) 시인, 드물게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오던 윤부현(尹富鉉), 정벽봉 선생들의 재미있는 방담이나소설가 심창화(沈昌化) 선생의 안경 너머 웃음, 서예가 부달선 선생의 한시, 그리고 일찍 타계한 김영일 화백의 그 아름다운 은발, 그를 그토록 아끼던 고여(如) 선생, 아아, 신포동이여, 그리움이여,방담이나 소재미있는
해거름이 지나 예쁜 여자 미술 학도와 함께 도착하던 미술평론가 김인환 교수, 소설가 이정태(李鼎泰) 교수, 살아 있다면…, 아직 한창 나이였을 이석인(寅), 허욱(旭), 이효윤(李孝) 시인들. 이제는 작품보다는 문인 사진작가로 더 유명한소설가 김일주(州) 형, 화가 장주봉(張桂鳳), 서울에서 이사 왔다가 다시 수원으로 살러 간 채성병(蔡成秉) 등도 해가 지면 신포동에서, 백항아리집에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유명했던 해장국집 답동관이 사라졌고 대폿집 충남집, 미미집이 사라졌다. 설렁탕집 금화식당, 화가들 미술전이나 시화전 단골 전시장이었던 은성다방등도 하나씩 문을 닫고 말았다. 염염집이 그 옛집이 아니고 마냥집 또한 할머니의 손맛과 다르다. 이제는 낯설기만 했던 딸이 운영하고 있다. 문협 월례회를 열고, 문학의 밤을 기획하던 밥집이 문을 닫았고 밤이 이슥하도록 문학론을 펴고 그림을 품평하던 신포동과 신포동의 술집들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려 이 근처를 배회하는 내게 마지막 신포동 백작이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백작의 작위는 세상을 떠난 손설향 시인에게 추서되어야 옳다. 신포동 문화에 가장잘 어울리는 시인은 그뿐이다. 그리고도 상찬(賞讚)이 남는다면 그에게 수없이 많은 날 동안, 매일 아비 공양하듯 약주 한 병과 북어 한 마리를 무상으로 올리던 미미집 주인 '보니파시오' (그의 이름을 이렇게 천주교 세례명으로밖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씨에게 돌아가야 한다. 나는 그저 손 시인 곁에서 공짜배기약주와 북어의 살을 무위로 축내었을 뿐이다.
6·25 사변 이후 90년대에 이르도록 가난했지만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던 신포동, 그냥 도로 포장이나 붉고 푸르게 해 놓고, 가로등이나 멋내서 세우면 문화의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득 문화라는 말에 걸맞은 내용물, 요새 즐겨 쓰는 말로 콘텐츠 개발을 하자는 생각이 든다. 우리 시민은 물론 외지인들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실한 문화 알맹이의 개발!
한 번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동상은 값이 비싸니까 이 신포동에서 몸으로 예술을 살다 간 한상억, 김길봉, 최병구, 손설향, 심창화, 김창황같은 시인, 작가들, 유희강, 박세림, 우문국, 김영일 같은 서예가들, 화가들, 그리고 여러 사진작가, 음악가들의 사진을 적당한 크기로 동판에 부조(浮彫)해서 신포동 길가에 설치하면 어떨까. 거기 동판 사진 밑에 간단한 약력과 대표 시 또는 대표작 한 구절과 일화를 새기는 것은 물론이다. 헐리우드 배우들의 손자국이나 발자국이 흥미로운 관광 자원이 되듯이 작고한 인천의, 신포동의 예술인들 모습을 그렇게 거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지역 홍보로도 그만일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혼자 신포동 약주에 취했는지 모르겠다. 옛날 윤갑로(尹甲老)인천시장이 미술인들과 더불어 백항아리집에 들르던 그 시절쯤 이런 생각이 났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신포동이 너무 쓸쓸하고 추워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들었나 보다. 최병구, 손설향 이 분들이 저 세상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반길까 어쩔까."
이 글을 쓴 때가 2003년 3월로 벌써 5년이 넘어 흘렀다. 다들 떠나버린 빈 골목을 혼자 걸으며 마음 춥고 허전해서 넋두리하듯 쓴 것인데 오늘 다시 또 옮겨온다. 이제 더 이상 신포동에 대해 써지지가 않는다.
슬프다는 생각뿐이다.
금년 봄이었던가. 그림 하는 젊은 후배들이 ‘사람과 사람' 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가끔 신포주점에서 다복집에서 대전집에서, 이렇게 마지막 셋 남은 목로에서 어울렸다. 이십년 전, 삼십년 전으로 돌아간 듯 오랜만에 편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신포동의 감정과 신포동의 생리를 모르는 그들이 여기 골목길을, 누추한 목로술집들을, 정겹게 가슴에 담을 수 있을까. 여기서 마시는 허름한 약주 맛과 의미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늦가을에 들어 이 세 술집 벽에다 두 번째 그림전시회를 열었다. 주인들도 손님들도 기뻐해 주었다. 이것이 옛날 그 진짜 신포동 모습이 아니냐고, 젊은 후배들도 이제서야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진짜 신포동을 가슴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이해하는 것 같았다. 전시회는 소리 없이 끝나간다. 며칠이면 다시 적막해질 것이다. 그러나 신포동은 이 늦가을 들어 아연 봄을 맞는다는 생각이다. 젊은 조각가들이, 화가들이, 사진가들이 다시 이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신포주점의 문을 슬며시 밀치면서 화창한 봄기운을 날라 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다시 그대들의 이름을 쓰련다. 신포동에서 사람과 사람의 이름을 쓰련다.
2008, 11, 22. 김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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