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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Miles Davis - Relaxin' 본문

음악이야기/재즈

Miles Davis - Relaxin'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3. 00:03

youtu.be/GSRy1HlEpf4

 

 

전설이 되어버린 재즈 거장
Miles Davis - Relaxin'


전설이 되어버린 재즈 거장...

재즈사에 가장 큰 인물로 평가받는 마일즈 데이비스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로 그를 수식한다고 해도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겠지요..

쿨과 하드밥,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재즈초보자인 저로서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론적 틀안에서 논하는 차이점이 아닌, 감상적 차이점을요..특히 사이드맨으로 등장하는 레드 갈랜드와 존 콜트레인..

 

앨범전곡감상

  

1. If I Were a Bell

2. You're My Everything

3. I Could Write a Book

4. Oleo

5. It Could Happen to You

6. Woody 'N You

 

신화의 탄생 - Birth Of The Mythology

치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여느 흑인들이 누리지 못한 경제적, 문화적 풍요 속에 성장할 수 있었던 마일즈 데이비스. 그는 줄리어드 음악원을 중퇴하고, 1944년 비 밥의 선구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뒤를 따른다. 찰리 파커는 1940년대 초, 전 세계를 들끓게 했던 스윙 재즈의 열기를 허물고, 비 밥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함으로써, 재즈를 즉흥성의 음악, 아티스트의 음악, 예술로서의 음악으로 귀착시킨 혁명아였다.

찰리 파커는 이 부잣집 소년으로부터 마약을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를 빌었고, 마일즈 데이비스는 천재 뮤지션으로부터 틈틈이 비 밥의 아이디어와 음악적 영감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1년여의 짧은 동거를 통해 마일즈 데이비스는 비 밥의 언어를 체득하고 한발씩 재즈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그는 우상이었던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함께 무대에 올랐고, 찰리 파커의 사보이(Savoy), 다이얼(Dial) 레코드 반에 세션으로 참가하며 재즈 신의 주목을 받는다.

1948년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건 밴드를 조직하며 일선에 나섰던 마일즈 데이비스가 재즈의 운명을 바꾼 출발점은 1949년과 1950년 편곡자 길 에반스(Gil Evans)와 함께 완성했던 BIRTH OF THE COOL이었다. ‘쿨의 탄생’이라는 제호에 걸맞게 이 앨범은 뮤지션들의 무분별한 즉흥 연주에만 기대며 대중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던 재즈의 관성을 뛰어넘는 새로운 스타일의 제안이었으며, 그 선언이었다.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 존 루이스(John Lewis), 군터 슐러, J. J. 존슨(J. J. Johnson), 맥스 로치(Max Roach) 등의 화려한 9인조 밴드를 대동한 이 작업에서는 즉흥성의 음악이라는 비 밥의 구호에 반(反)하는 잘 짜여진 편곡에의 음악으로 재즈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들의 음악에서는 느슨한 솔로 라인, 절제된 앙상블, 정교하면서도 느린 전개 등으로 앨범은 성공을 거두었고, 쿨 재즈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갔지만,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가 연출한 쿨 재즈의 시나리오를 접고 이내 새로운 공간을 찾아 항해를 나선다. 그가 찾아나선 새로운 땅은 하드 밥이었다. 1951년부터 몸담게 된 <프레스티지(Prestige)> 레코드에서 그는 하드 밥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다시 한번 모던 재즈의 역사의 중심을 질주한다. ’51년 10월 5일에 녹음된 앨범은 하드 밥의 여명을 여는 걸작이었다. 테너 색소폰 주자 소니 롤린스(Sony Rollins), 드럼에 아트 블레이키(Art Blakey)를 포진시킨 이 세션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심벌 레가토로 국한되던 드럼의 비중을 혼 악기와 함께 프런트에 내세우며 악기간의 밀도 넘치는 즉흥 연주를 끌어옴으로써 새로운 음악적 전환을 기하게 된다.

1953년까지 마일즈 데이비스는 마약 복용 혐의로 당분간의 활동을 중단하게 되지만, 그는 이듬해 마약의 유혹을 뿌리치고 재기에 성공한다. 1954년 마일즈 데이비스는 WALKIN', BAGS GROOVE 등의 명반을 일구며 휴지기를 걷고 새로운 실험에 몰두한다. 그 해 마일즈 데이비스는 소니 롤린스와의 세션에서 종래에 볼 수 없는 뮤트 트럼펫을 재즈에 소개한다.

트럼페터로서의 마일즈 데이비스 역시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전적인 트럼펫 스타일, 즉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에서부터 비롯된 트럼펫의 악기적 이미지와 디지 길레스피가 대표해 온 고음역에서 솟구치는 화려한 롱 톤 프레이즈와 빠른 애드 리브의 특징에 그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주로 중음역을 중심으로 한 여유롭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중심으로 프레이즈를 이끌었던 마일즈 데이비스에겐 ‘평범한 트럼페터’라는 오명이 그의 명성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마일즈 데이비스는 트럼페터로서의 결함이었던 유약한 음량과 여린 톤을 뮤트 트럼펫을 통해 그만의 장점, 트럼펫 스타일로 보완한다. 이를 통해 마일즈 데이비스는 트럼페터로서의 자기 위상에도 더욱 능동적일 수 있었다.

재즈 피아노의 거인 실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와 나눴던 팽팽한 긴장감 속의 작품 BAGS GROOVE 이후 마일즈 데이비스는 소위 -ING 시리즈라 일컫어지는 네 장의 연작 앨범 COOKIN', RELAXIN', WORKIN', STEAMIN'을 통해 하드 밥의 진수를 제시한다. 불과 이틀만에 완성한 이 네 장의 앨범은 재즈 역사에 또 다른 선물을 선사하는데. 그것은 그와 함께 모던 재즈를 발전 일로로 견인했던 세션 맨들이었다.

이른바 제 1기 마일즈 데이비스 5중주단(Quintet), 또는 뉴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The New Miles Davis Quintet)이라 불렸던 이 그룹에는 훗날 마일즈 데이비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테너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과 피아니스트 레드 갈란드(Red Garland), 베이시스트 폴 챔버스(Paul Chambers), 드러머 필리 조 존스(Philly Joe Johns)로 짜여진 빈틈없는 라인업이었다. 마일즈 데이비스-존 콜트레인의 프런트 라인은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지와 사랑>의 두 주인공처럼 서로의 빈 곳을 적절하게 메우는 대비와 조화가 완벽하게 구성된 하모니를 제공했다.

더불어 레드 갈란드, 폴 챔버스, 필리 조 존스의 리듬 섹션은 멜로디를 동반한 폴 챔버스의 강인한 베이스 사운드, 필리 조 존스의 정확한 타임 키핑과 스윙감 넘치는 라이드 심벌, 그리고 레드 갈란드의 여유 있는 스윙 터치와 세련된 블록 코드가 어우러진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을 재즈 역사상 최고의 캄보라고 평하게 만들었다.

이후 계속되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적 실험 속에서도 ’50년대 황금의 라인업에 필적할 만한 또 다른 퀸텟을 결성하기까지는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들과 함께 ’50년대 초반의 음악적 모색을 거쳐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 밥의 언어를 가장 화려하게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또한 콜롬비아로 이적 직후 길 에반스와의 작업을 염두에 둔다면 어쩌면 프레스티지 시절의 마지막 녹음들은 마일즈 데이비스가 밥의 언어들이 지닌 한계들을 인식하고 전환을 모색하려 했던 순간에 행해진 연주라고 볼 수 있다.

코드에서 모드로의 전환


1958년 마일즈 데이비스는 황금 퀸텟을 대동한 채 프레스티지에서 콜럼비아로 음악적 둥지를 옮긴다. 재즈가 추락하고 있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상업적인 성공을 약속했던 마일즈 데이비스를 품에 넣은 콜럼비아사는 그에게 많은 투자와 후원을 약속했다. 더불어 이런 든든한 배경 속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1986년 워너 브라더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콜럼비아에서 더욱 자신의 탐구 열의를 드높인다.

솔로 애드 리브와 앙상블의 하모니를 완벽하게 구현한 콜럼비아에서의 데뷔작 ROUND ABOUT MIDNIGHT을 시작으로 마일즈 데이비스는 지칠줄 모르는 창조력을 발휘한다. 그가 우선 행한 작업은 BIRTH OF THE COOL의 조력자였던 편곡가 길 에반스와 다시 손을 잡는 것이었다. BIRTH OF THE COOL과는 사뭇 다른 클래시적인 음악. 그것은 제 3의 물결(The Third Stream)이라 불리는 재즈와 클래식의 조화였다. 길 에반스가 직조해 놓은 오케스트라 편곡 위에 덧입혀진 마일즈 데이비스의 공명된 트럼펫은 재즈의 또 다른 방향을 예감케 했다.

그는 길 에반스와의 공동 작업 속에서 1958년 조지 거쉰의 오페라 를 새롭게 구조하였으며, 1959년 레코딩한 SKETCHES OF SPAIN에서는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과 같은 클래식 레퍼토리와 스페인 민요 주제를 발전시켰고, MILES AHEAD에서는 스페인 음악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PORGY AND BESS에서는 40인조 풀 오케스트라를 토대로 교향악적인 구성 속에서 관악기를 대치시킴으로써 보다 풍부하고 넉넉한 사운드를 만들었고, 더불어 편곡에 있어 명암법(明暗法)을도입하여 당시의 재즈 신에 새로운 활력을 안겨 주었다.

길 에반스와의 공조 속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모드(Mode)라는 새로운 탈출구를 발견하게 된다. ‘선법(禪法)’이라는 의미 그대로 음악적 이미지를 토대로 자유로운 즉흥 연주의 구상을 발전시킨 실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기존의 밥 스타일의 연주에서는 즉흥 연주 이전에 다음 연주의 코드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코드의 진행과 예측할 수 없는 코드의 전개로 즉흥 연주의 한계가 도달하자 마일즈 데이비스는 논리와 영감에 의존한 새로운 형태의 즉흥 연주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그의 모드 주법에 대한 노력과 고민의 결실은 그 어떤 재즈 전문지, 평론가들도 별 5개를 헌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최고의 작품 KIND OF BLUE였다. 길 에반스와의 협연 PORGY AND BESS와 SKETCHES OF SPAIN 사이에 완성된 KIND OF BLUE에는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Bill Evans)를 등용하고, 알토 색소포니스트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y)를 존 콜트레인과 대치시키고, 드럼엔 지미 콥(Jimmy Cobb)이 참여하고 있다.

이후 마일즈 데이비스는 ’50년대 말과 ’60년대의 전반을 모달 재즈에 의해 자신의 음악을 풀어 나간다. 그 사이 ’59년에서 ’63년까지 주로 윈튼 켈리(Wynton Kelly, 피아노), 행크 모블리(Hank Mobley, 테너 색소폰), 폴 챔버스, 지미 콥의 라인과 함께 작업했는데,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을 위시한 일련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트럼펫 솔로에 보다 비중을 두며 즉흥 연주라는 음악적 과제에 심각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런 즉흥성의 연장 작업은 마일즈의 다음 행보를 예감케 했다. 많은 뮤지션들이 들락 날락거렸던 마일즈 데이비스 사단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것은 1963년-68년까지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베이시스트 론 카터(Ron Carter), 드럼에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테너 색소포니스트 조지 콜맨(George Coleman), 웨인 쇼터(Wayne Shorter)가 자리를 잡으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10대와 20대의 젊은 피를 수혈한 새로운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은 그들의 음악을 ‘새로운 창조의 대지’라는 격찬을 수확해 왔다. 특히 ’64년부터 마일즈 데이비스 호에 승선한 웨인 쇼터는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독창적이고 신선한 작곡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그룹의 2인자로 마일즈 데이비스를 비호했다.

BITCHES BREW의 파장

1960년대는 재즈의 혼란기였다. 록과 팝의 물결로 재즈는 설 자리를 잃고, 하드 밥은 표류하였으며, 백인 재즈 뮤지션들은 보사노바라는 브라질에서 불어온 열풍으로 이주해갔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당시 재즈의 커다란 조류였던 프리 재즈의 대열에 MILES IN THE SKY, IN A SILENT WAY 등의 앨범을 들고 참여한다. 그것은 그가 이후 행하게 될 음악적 변혁의 예고이자 암시였다. '68년 작 MILES IN THE SKY에 수록된 ‘Stuff'에서는 허비 행콕이 일렉트릭 피아노를, Paraphernalia에서는 조지 벤슨(George Benson)이 일레트릭 기타를 연주하여, 그의 음악에 처음으로 전자 악기가 채용된다.

같은 해 가을에 녹음된 FLIES DE KILIMANJARO에서는 전체적으로 8비트와 펑키 리듬의 적극적인 도입이 눈에 두드러진다. 이듬해 IN A SILENT WAY에서는 영국에서 날아온 기타리스트 존 맥러플린(John McLaughlin)과 키보디스트 조 자비눌(Joe Zawinul)이 참여하여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일렉트릭 록의 정서를 흡입시킨다. 이 무렵 마일즈 데이비스는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cks)의 음악에 심취하고 있을 때였다. 청명한 트럼펫과 어쿠스틱 재즈의 진수에 몰입해 오던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에 징징 울어대는 일렉트릭의 음색이 드리워지는 것은 이 무렵이었다.

우리가 흔히 퓨전(Fusion)이라 칭하는 음악. 록과 재즈를 결합시킨 새로운 재즈의 혁명은 이렇게 점화되었다. 그리고 MILES IN THE SKY, FILLES DE KILIMANJARO, IN A SILENT WAY의 전조들은 1969년 8월에 녹음된 BICHES BREW를 통해 퓨전 재즈 시대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초기 퓨전 재즈 스타일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재즈나 GRP 레코드의 퓨전 재즈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일련의 작품들은 록과 재즈의 접목이 시도되었을 뿐, 그 음악적 성격은 프리 재즈에 가깝다. 그 음악 속에 반영된 내용이 정신적인 세계와 주술, 종교, 민족 음악에 대한 의지가 짙게 반영되고 있어 더욱 복잡하고 그로테스크한 심상으로 가득하여 그것은 마치 집단 환각에 가깝다.

모든 예술의 변혁이 그렇듯이 BITCHES BREW 역시 당시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재즈계에 광풍을 몰고 왔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예언은 재즈의 진로를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작품을 논하며 으레 거론되는 일렉트릭 사운드와 록 비트는 이 거대한 혁명에 극히 미약한 부분에 대한 언급에 지나지 않는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원시적인 주술 세계, 그것을 위해 그가 끌어들였던 새로운 모드들과 그에게 보수라는 굴레로 내몰았던 프리 재즈의 집단 즉흥 연주의 부분적 수용은 일렉트릭 사운드와 폴리 리듬과 어울리면서 재즈를 ’70년대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BICHES BREW는 표류하고 있던 재즈에 마일즈 데이비스가 내린 은혜로운 축복이자 동시에 재즈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든 저주이기도 했다. BICHES BREW에서 비롯된 혁명으로부터 재즈는 암흑의 시대 ’70년대를 연명할 수 있었지만, 결국 재즈는 지난 세월의 방향과 이상들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재즈 역사에 가장 많은 논란을 몰고 왔던 이 앨범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세 명의 드러머, 두 명의 베이시스트, 그리고 한 명의 퍼커션 주자에 의해 쏟아지는 현란한 폴리 리듬(Poly Rhythm)과 키보드와 일렉트릭 기타에서 퍼붓는 무차별적인 록 사운드로 고전적인 재즈의 이미지를 해체시켜 버린다. 더불어 마일즈 데이비스는 이를 통해 자신만이 구상해왔던 프리 재즈의 해답을 동시에 제시한다.

끝나지 않은 혁명

마일즈 데이비스가 데려왔던 ‘퓨전 재즈’라는 사생아를 향해 무수히 많은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즈의 실험과 진화에 더욱 매진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곁엔 그가 내세운 변혁의 깃발 아래 모인 젊은 뮤지션들이 가득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신의 트럼펫에 전자 액세서리를 이용하여 와와를 부착하고, 이펙터 처리를 강조하였고, 뮤트 트럼펫은 지속시켰지만 이전의 정제된 프레이즈에서 이탈하여 굴곡 많은 거친 프레이즈를 즐겨 사용하였다.

후기 마일즈 데이비스의 주요한 변화 중 하나는 그가 인종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MILES SMILES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흑인으로서의 자의식은 NEFERTITI(’67년), FILLES DE KILIMANJARO를 거쳐 ’70년에 발표한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 잭 존슨에게 헌정하는 사운드 트랙 A TRIBUTE TO JACK JOHNSON으로 귀착된다. 그의 록에 대한 열의는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으며, ’72년 발표한 on THE CORNER에서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영향을 받은 펑키 사운드에 대한 관심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75년부터 ’80년까지 마일즈 데이비스는 목 염증의 악화로 5년간의 휴지기를 갖는 동안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가 행할 새로운 여정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1980대를 맞이하며 그는 신인 뮤지션들을 발굴하며 그들의 번득이는 감각을 무제한으로 열어 주었다.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 베이스),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 기타), 마이크 스턴(Mike Stern, 기타) 들의 재능을 품에 안은 마일즈 데이비스는 ’84년작 YOU'RE UNDER ARREST에서 마이클 잭슨과 신디 로퍼의 팝 넘버를 수용하며 다시 한번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84년 덴마크 정부로부터 ‘Sonning Prize'의 영예를 선물 받은 마일즈 데이비스는 ‘85년작 AURA를 마지막으로 30여 년간 몸담았던 콜럼비아 레코드를 떠난다. ‘86년 그는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을 맺으며 최후의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86년 워너에서의 데뷔작 TU TU는 또 다른 충격과 논란을 생산했다. 그는 이 앨범에서 컴퓨터 사운드와 펑키, 블루스의 기반 위에 힙 합 리듬까지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투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지도자인 투투 주교와 넬슨 만델라에게 바치는, 그의 흑인으로서의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이후 영화 음악 SIESTA 이후 그는 '89년 AMANDRA를 통해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자유와 권력을 되찾게 하자는 운동에 지지를 보낸다.

1990년 과거 클래시컬한 편성에서 협연을 나누었던 피아니스트 미셸 르그랑(Michele Legrand)과의 대화를 담은 DINGO 이후 1991년 그는 DOO BOP 앨범을 통해 ’90년대 재즈 신의 또 다른 변혁을 재촉하였다. 그가 재즈의 새로운 방향의 선언으로 던졌던 모든 앨범 앞에는 논란과 비판이 앞섰듯이 DOO BOP을 향해서도 세인들은 ‘장난 같은 짓’, ‘호기만을 내세웠던 노인의 망령’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이 앨범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래퍼와 DJ 이지 모 비(Easy Mo Bee)를 끌어 들여, 제임스 브라운, 쿨 앤 더 갱(Kool & The Gang) 등의 레퍼토리를 샘플링하여 랩(Rap)과 힙 합(Hip Hop)과의 극적인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바로 오늘날 재즈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는 애시드 재즈의 효시였다.

그 해 7월 몽트뢰(Montreux) 재즈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마일즈 데이비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 모던 재즈 시대의 명곡들을 처연하게 연주하였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연주는 일종의 회귀 본능이었을까 ?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91년 9월 28일, 마일즈 데이비스는 새로움을 향해 끊임없이 항해했던 길고 고독했던 여정을 멈추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 해 그래미에서는 카멜레온처럼 변화와 변화를 거듭하며, 재즈와 미국의 대중 음악 전반의 발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평생 공로상의 꽃다발을 그의 무덤에 헌화했다.

Epilogue

마일즈 데이비스가 이루어낸 재즈 스타일은 다른 스타일과 명확히 구분되는 독특한 세계였다. 그는 천재 뮤지션들이 어김없이 갖추고 있었던 단명이나 좌절, 불행한 운명이라는 요소를 동반하지 못했다. 어쩌면 처음 재즈와 인연을 맺은 이래 실패와 추락을 경험하지 못했던 그에게 이런 정상에서의 오랜 집권은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일즈 데이비스는 단 한 순간도 최고의 지위에서 향유하는 달콤함에 젖은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새로움이라는 지상 과제를 향해 자신의 의식과 창조력을 다 바쳤으며, 이런 진취적인 자세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몸담았던 재즈의 ’50년사의 모든 음악적 환경을 변모시켰다. 그가 변신을 거듭할 때마다 수많은 비방자가 나서 돌을 던졌지만, 한 시기가 지나면 그들은 자신의 무지했던 판단과 잘못을 감추기에 급급하였다.

그는 1940년대 이후 재즈에 대한 이미지를 직접 설립하였고, 또한 그것을 직접 붕괴시켰던 재즈의 상징이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재즈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혜안(慧眼)을 소유했던 선지자였다. 그는 매너리즘을 죄악시하며 재즈의 역사를 저술했던 집필자로, 정체된 재즈의 흐름에 새로운 공기를 환기시킴으로써 재즈를 오늘에까지 이어 주었다. 그의 존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재즈 아티스트의 영혼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적 그림자가 21세기 재즈의 변화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하는 것은 조슈아 레드맨(Joshua Redman, ’90년대 재즈의 흐름을 열어가고 있는 색소폰 주자)가 남긴 다음의 회고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산만하게 이어졌던 마일즈 데이비스의 흔적에 대한 결언으로대신한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사망했을 때 모두들 이제 누가 재즈라는 큰 배를 이끌 것인가? 걱정했다. 그는 뮤지션 이전에 재즈의 운명을 이끌어 왔던 존재였다. 비 밥, 하드 밥, 쿨 재즈, 퓨전 재즈...재즈 스타일의 전환 지점에는 언제나 마일즈 데이비스가 그 중심에 있었다....1968년 데이비스는 록 기타의 영웅 지미 헨드릭스와 조우했고, 지미 헨드릭스는 블루스의 힘을 팝의 보편성에 접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요시되지 않던 기타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 악기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후 키보드 베이스는 물론 관악기까지 기타의 뒤를 이어 전자화 시켰다. 만일 마일즈 데이비스가 아닌 다른 무명의 뮤지션이 그런 작업을 행했을 때에도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