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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Bagdad Cafe / Calling you - Jevetta Steele / 1988 본문

음악이야기/영화음악

Bagdad Cafe / Calling you - Jevetta Steele / 1988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7. 01:24

https://youtu.be/oCLpLWcX2cg?si=UFQM-L4GHRN6qFGM

 

당신이 행복할 것 같아서 
바그다드 카페 | Bagdad Cafe | 1988

노희경 | 방송작가,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꽃보다 아름다워〉

1993년 겨울, 나는 본가를 나와 불광동 허름한 다세대 주택가의 반지하방에 살고 있었다. 말이 좋아 원룸이지 주방과 거실, 화장실이 열 평 남짓한 공간에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그 집에, 돈 주고 산 거라곤 대학 선배가 선심쓰듯 10만 원에 넘겨준 부피 큰 워드프로세서가 전부였다. 집안 구석구석에 자리한 다섯 칸짜리 서랍장과 자개 장식장, 스테인리스 옷걸이 등은 모두 길가에 버려진 이삿짐 속에서 동생과 내가 건진 것들이었다.

방 안에 놓인 살림살이보다 더 궁상스러운 건 내 처지였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홧김에 떠난 여행에서 퇴직금은 바닥이 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방송작가원의 작가 수업을 받기위해선 단돈 60만 원도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다시 직장을 구해 나가든지, 하루라도 빨리 데뷔를 해서 원고료를 타든지. 사는 게 하루하루 절체절명의 순간 같았던 그 시절, 나는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만났다.

그때, 내 일주일 용돈은 2만 원이었다. 그 2만 원을 알차게 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조악한 가계부를 써야 했다.외출지는 작가연수원이 있는 여의도로 한정짓고, 버스 값과 커피 값만을 쓰기 위해 저녁이면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남아도는 게 시간뿐인지라 책 보는 게 일인데,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돈 쏟아붓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책 대여점에서 한물간 책들을 헐값에 사 보는 것이었다. 헌 책이라도 근간의 것들이 많아 책값의 절반은 물어야했다. 일주일 동안 단 한 번 외출을 하면서 헌 책 두세 권을사고 손에 남겨진 돈은 고작해야 2천 원에서 4천 원, 영화관관람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디오만이 여가 생활을 즐길 수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디오테이프를 고를 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자칫 비디오테이프 선택을 잘못하면 일주일의 여가 생활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버릇이 남들의 입을 통하든, 책자를 통하는 몇 번씩 좋다고 검증된 비디오테이프만을 선별해 보는 것이었다. <바그다드 카페> 역시, 그렇게 선별된 비디오테이프였다.

영화의 처음은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웠다. 주인공 백인 여잔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만큼 크고 둔했으며, 다른 주인공으로 보이는 흑인 여잔 눈이 무섭게 번들거리는 데다 신경질적이었다. 영화는 야스민이 커피 없는 바그다드 카페로 오고, 오고 나서도 한참을 스토리 없이 흘러갔다. 야스민은 몇 번이고 '문츠크테트너 부인' 이라는 어려운 제 이름을 카페 주인 브렌다에게 알리려 했고, 브렌다는 손님인 그녀에게 이유없이 불친절했다. 브렌다의 남편은 사소한 말다툼을 빌미 삼아 집을 나갔고, 브렌다의 아들과 딸은 속 터지게 제 어미 말을 듣지 않았다. 카우보이 차림의 쿡스는 일없이 실실 웃어 괜히 보는 이의 비위를 긁었고, 문신을 새기는 여자는 누구에게도 이름이 안 불려진 채 말없이 서성이기만 했다. 게다가 커피도 못 끓이는 바텐더는 왜 거기 있는 건지.….

그런데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야스민이 1호 방으로 와서 하던 그 행동, 그녀는 단순히 하루 기거할 여인숙에서 제 집처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장식을 했다. 먼지가 폴폴 나는 마룻바닥을 무릎까지 꿇고 정성스레 걸레질하던 그녀가 난 왜 그렇게 뭉클했을까. 이후, 장기 투숙자로 바뀐 야스민의 별난 행동은 계속된다. 카페의 간판을 닦고, 사무실을 정리하고, 주방을 치우고, 아무도 안아주지 않아 울기만 하던 브렌다의 손자를 어르고, 쿵쾅거리며 화음이안 맞는 건반을 쉼 없이 두드리던 브렌다의 아들의 음악을 감상해 주는...

브렌다는 그런 야스민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누구에게도 호의를 받아 보지 못한 브렌다의 눈에 야스민의 친절은일상을 뒤흔드는 위협이었다. 어느 날, 브렌다는 야스민에게 거두절미하고 떠나라 소리친다. 그때, 브렌다의 그 고함 뒤에 야스민이 한 대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브렌다 당신이 뭔데, 내 아이들과 어울리고, 내 집을 청소해! 야스민 (머뭇대며) 나는 그냥 당신이 좋아할 거 같아서……

야스민은 누군가를 기분좋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코카인을 흡입하고 운전 도중에도 술병을 불어 대던, 삶을 장난 같이 사는 자신의 남편에겐 매몰찬 눈빛과 뺨 세례를 날렸으면서도, 도망간 남편을 둔, 반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서 거친 트럭 운전자들을 상대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삶을 전쟁 같이 사는 브렌다에겐 그녀는 한없이 너그럽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즐겁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이 즐거운 모습을 보기 위해 마술을 익히고, 쇼를 하고, 모델이 된 야스민, 남을 웃기려다 끝내 자신마저 즐거워져 버린 야스민, 나는 그녀가 너무 예뻐서 그 밤 울어 버렸다.

방영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길 수십 수백 날, 내 작품 때문에 지금까진 아무도 행복하지 않지만, 나는 야스민 같은 노력을 멈추진 않겠다. 야스민이 떠나고 그 잘 날던 부메랑도 추락하고, 사람들 모두 다시 사는 게 시들해졌다. 과한 바람일까. 내 드라마가 없는 날, 바그다드 카페의 사람들이 야스민을 기다리듯 대중들이 나를 기다리게 할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감독 퍼시 애들론 | 출연 마리안 제게브레히트, CCH 파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