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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열혈남아 / As Tears Go By / 1988 본문
공중전화 부스에서의 키스 같은
열혈남아 As Tears Go By | 1988
김홍준 | 영화감독, 한국예술 종합학교 영상원 원장, <장밋빛 인생> <정글스토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 편의 영화를 만날 때, 가장 행복한 만남의 순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자신이 숭배하는 감독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다 드디어 마주하는 설렘으로? 완벽한 상영 조건을 갖춘 극장에서, 소문만 들었던 걸작의 실체를 확인하는 충만감으로? 아니면 메마른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맑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게 하는 목으로?
그러나 아무 준비 없이 미지의 영화와 마주쳐 그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느끼는 행복감만 한 것은 없다고 나는 믿는 쪽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세계와 가까워질수록, 영화에 대한 지식과 교양이 늘어갈수록, 이러한 순간을 만날 가능성은 더 적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에 대한 정보와 담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요즘에야, 애써 눈을 감고 귀를 막기 전에는 기대와 예측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거의 박탈당한 꼴이니까.
<열혈남아>는 그렇게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부터 거의 10년 전 햇살이 제법 따갑던 어느 날, 미아리 대지극장에서 촌스런 간판을 내걸고, 나는 그때 내 삶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었다. 무기력, 답답함, 그리움, 초조감 속에서 남은 삶을 무엇으로 채우겠다는 뚜렷한 생각도 없이. 그래서 그날, 무거운 오후를 떨쳐 버릴 '킬링 타임' 용 영화라도 한 편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제목과 간판에 끌려 표를 끊고 어두운 극장으로 들어갔다. 유혈 낭자한 총격전과 화끈한 몸싸움, 거기에 덤으로 삼삼한 베드신이라도 나오기를 기대하는 '보통 관객'의 한 사람으로,
영화는 제법 산뜻하게 시작했다. 흠, 저 친구가 주연배우인가 보지 제법 우수에 젖은 마스크를 가졌구먼(나중에 확인한 그의 이름은 유덕화였다). 뒷골목 깡패들의 이야기에 약간의 로맨스를 버무린, 뻔한 이야기네. 그런데 액션은 왜 아직 안 나오는 거야? 흠, 당구장 신은 제법 다이내믹하게 찍었고, 그런데! 포장마차(정확히 표현하자면 포장을 둘러친 공중전화 부스에서의 키스 같은 천 술집) 신에서부터 내 눈은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속 들여다보이는 유치함을 비웃는 대신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야구방망이와 찌그러진 콜라 깡통이 난무하는 구타 장면에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장내가 환해지고 듬성듬성 앉은 관객들이 의자를 삐걱거리며 일어설 때, 나는 싸구려 홍콩 영화한 편에 넋이 나간 자신을 한심해하며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이 영화가 왜 나를 이처럼 흔드는 거지? 수준 높게 영화를 보아왔다고 자부하던 나의 감수성이 이 영화의 통속성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 내가 영화를 보는, 세상을 보는,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근본적으로 달라져 버린 건 아닌지? 그러다가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게 나야. 유치하고 통속적이며 감상적인 나. <열혈남아〉 같은 영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나. 내 멋대로의 기준으로 영화를 가늠하는나. 이렇게 걱정을 멈추고 <열혈남아>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자 혼란은 사라지고 나는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왕가위는 발견되었고, 유행되었고, 모든 유행이 그렇듯 제철이 끝나자 지나갔다. <열혈남아>는 걸작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걸작을만든 감독의 데뷔작으로는 기억되겠지만, 만약 내가 남들 앞에서 <열혈남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왕가위라는 감독 또는 홍콩 영화라는 맥락에서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내 마음속 풍경에서 <열혈남아>는 햇살 따갑던 날 미아리 대지극장에서 만났던 '싸구려' 홍콩 영화로 영영 남아 있을 따름인데,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의 입맞춤만큼 통속적인, 행복한 만남의 추억으로 말이다.
유덕화 熱血男兒
감독 왕가위 | 출연 유덕화, 장만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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