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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남과 여 A Man and a Woman1966 / 프랑스 영화처럼 본문
프랑스 영화처럼
남과 여 A Man and a Woman1966
윤석호 | 프리랜서 드라마 PD,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
“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소리 스며들어, 마음 설레고 쓸쓸하여라."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시를 좋아했는데 어느 날 <세계의 명시>를 펼치다가 울컥했던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라는 시 앞부분이다. '비올롱' 이 뭔지는 몰랐어도 '가을날과 '긴 흐느낌' 이란 단어가 가슴을 휑하게 할 만큼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나중에 비올롱이 바이올린의 불어식 표기임을 알았고, 불어의 시적인 언어에 끌렸다. 종점 다방에서 설탕 듬뿍듬뿍 넣어서 커피를 보약처럼 마시던 시절엔, 책에서 보던 '카페테리아', '아틀리에', '테아트르'라는 불어에서도 무드가 느껴졌다. 불어에 대한 동경으로 대학 때는 샹송 동아리에 들어 안 되는 혀를 굴려가며 이브 몽탕의 '고엽',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을 불러댔고, 그건 내 18번이 되었다. 더벅머리를 하고서 경복궁 앞 프랑스 문화원 지하 극장에서 보았던 프랑스 영화는 왜 또 그렇게 아득하고 감미로웠던지..
내 청춘도 사랑으로 아득하던 어느 날 보게 된 영화가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다.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프랑스 영화 하면 첫손가락에 꼽히는 영화다. 여주인공 아누크 에메의 지성미와 고상함은, 지하철 통풍구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100만 달러짜리 각선미를 자랑하고 샤넬 No.5가 잠옷이라는 섹시 심벌 마릴린 먼로도 우아하게 배반한다. 한여름에도 추울 것 같은 여자 아누크 에메의 우스와 공허에 가득 찬 눈빛에 빠져들었고, 로맨틱하고 서정적인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의 감미로움에 빠져들었다. 자동차 유리창 위에선 와이퍼가 세찬 빗줄기를 쓸어내리고, 차 안에선 남과 여, 그 묘한 사랑의 떨림들이 이어지고.. 이 모두가 프랑스풍의 동경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그 뒤에 드라마 PD가 되어서도 때려 부수고 뒤집어엎는 걸로 제작비를 팡팡 쏟아붓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보다는 디테일 하나를 잡아내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했다.
<남과 여>는 남편과 사별한 스크립터 여자와 자동차 레이서인 남자가 어린 자녀들의 기숙사를 오고가다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지만 과거 사랑했던 흔적 때문에 주저하다가 라스트 신에서 재결합한다는 내용이다. 그다지 극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줄거리다. 대다수 프랑스 영화가 그렇듯 대단한 서사 구조가 없어도 영화의 독특한 영상 기법이 색다른 소스 맛으로 영화를 버무려낸다. <남과 여>도 절제된 대사에 시적인 영상미, 그 속에서 쓸쓸하게 혹은 감미롭게 넘실대는 프란시스 레이의 보사노바풍 멜로디, 그리고 고독한 미인 안느 역의 아누크 에메와 외로운 남자 장 루이 역의 장 루이 트랭티냥의 디테일한 표정 연기, 컬러와 흑백을 경계 없이 넘나드는 독특한 몽타주, 이 모든 것들이 따로국밥처럼 따로 놀지 않고 섞어찌개처럼 잘 어우러져서 감성에 호소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비 오는 날 여자가 기차를 놓치고처음으로 남자 차에 탔던 장면이다. 남자가 라디오를 트니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남과 여는 픽하고 웃으며 비로소 어색한 기운을 털어 내는데, 심리적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바닷가에서 각자 어린 딸과 아들을 안고 있을 때 여자 손을 잡으려다 마는 남자 손의 클로즈업... 그리고 그 뒤 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을 때 아누크 에메의 표정을 거의 1분 정도 롱테이크로 놓는데, 그 표정의 디테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상과 음악, 심리적 디테일의 3박자가 들어맞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1996년 드라마 게임을 연출하게 됐을 때 아예 제목을 '프랑스 영화처럼'으로 정하고 단막극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남과 여>는 논리보다 감각에 호소하고 작 지만 오래 남는 소품 같은 영화다. 아직 부족하지만 언제나 <남과 여>처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다.
핸들을 잡으면 살랑대는 봄 햇살에 매일 오가는 길을 벗어나 이정표를 무시하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계절이다.사랑, 그건 유효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하찮은 화학반응 정도라 하더라도 이 봄날, 안느로부터 날아온 사랑의 전보를 받아 들고 6,000km 거리를 액셀러레이터 밟아 여자한테 달려가는 장 루이가 돼 보고 싶진 않은지. 인생 한 방, 사랑 한 방을 외치는 시대지만 그렇게 달려간 바닷가에서 안느를 발견하고도 달려가지 않고 헤드라이트 불빛을 백사장에 깜빡이며 한 템포 쉬어가는 뜸 들이는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은지 기차역으로 여자를 떠나보내고 이대로 끝낼 것인가 고뇌하다가. 기차를 갈아타는 역에 먼저 마중 나가 기차에서 내리는 놓쳐 버린 사랑을 붙들고 싶진 않은지. 왜냐하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며 봄날은 갈 것이고, 세월은 우리 곁에 그리 오래 머물러 줄 만큼 친절하지 않으므로……….
un homme et une femme
감독 클로드 를르슈 | 출연 아누크 에매, 장 루이 트랭티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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