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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그리스 Grease 1978 / 춤추고 노래하라! 본문

음악이야기/영화음악

그리스 Grease 1978 / 춤추고 노래하라!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8. 00:25

https://youtu.be/OjAYkhEN700

 

 

춤추고 노래하라!

 그리스 Grease1978
백민석 | 소설가. <내가 사랑한 캔디> <목화밭 엽기전> <러셔>

 어째서 내가 그리스>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날렵한 몸매의 존 트라볼타를 볼 수 있어서 그런가. 올리비아 뉴튼 존을 110분짜리 극영화로 볼 수 있어서 그런가. 10대처럼 보이는 그녀를 앞에 두고 은밀한 상상을 할 수 있어서 그런가. 확실히 〈펄프 픽션〉의 존 트라볼타는 굼떴다. 총을 난사할 때도 뻣뻣이 버티고 서서 꿈쩍도 않는다. 와이셔츠는 뱃살에 밀려 벨트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카메라에 길게 잡힌 올리비아 뉴튼 존은 별로 본 적이 없다. 7, 8년 전 무슨 동물 보호 다큐멘터리에선가 보고, 그보다 더 오래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에서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입을맞춘다. 나에게 <그리스>가 흥미로웠던 건 이 영화의 재편집판 클립을 보고 나서다. MTV 홍보용 클립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감탄했다. 우선 착착 감겨오는 슈가 팝들이 그랬고, 자동차 보닛 위에서 빠르게 스텝을 밟고 훌쩍 뛰어내리는 트라볼타가 그랬다. 뉴튼 존의 두 손으로 넉넉히 감쌀 수 있을만치 가느다란 허리 사이즈가 그랬다.

 트라볼타와 뉴튼 존은 사실, 내가 속한 세대의 연예 스타는 아니다. 트라볼타는 <펄프 픽션> 이후로 인기 상종가를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걸 재기에 성공했다고 부른다. 그는 팝 그룹 비지스와 함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전반에 걸친 디스코 열풍의 주역이었다. 그의 출세작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 앨범의 재킷은, 디스코텍의 스테이지에 마치링 위의 록키처럼 우뚝 올라선 그의 초상이었다. 디스코 스타로서의 그의 인기가 막을 내린 것도 역시, 비지스와 함께한 디스코 영화 〈스테잉 얼라이브>에서였다. 이 영화 사운드트랙의 재킷엔 디스코를 너무 열심히 추느라 흘러내린 땀을 처리하기 위해 머리에 밴드까지 두른 댄서의 초상으로 그가 실려 있다(이 영화의 제작에는 실제로 실베스터 스탤론이 참여하기도 했다).

 뉴튼 존 역시 트라볼타와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얻고 잃었다. 디스코 음악 싱어나 배우로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70년대 내내 컨트리 싱어였고, 첫 히트 앨범은 73년에 냈다(그녀는 이 앨범으로 빌보드차트에서 밥 딜런을 눌렀다!). 그녀가 48년생임을 감안한다면, 밥 딜런의 라이벌이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8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제나두 Xenadu'와 피지컬 Physical' 같은 댄스 음악은 그러니까 그녀 음악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뉴튼 존이 인기를 끈 것도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이었다. 특히 70년대에 그녀가 낸 앨범들은 거의 모두 우리 시장에 라이선스를 받아 출시되었다(여기서도 그녀는 밥 딜런을 이겼다). 이 글에 쓰인 자료들은 인터넷이나 책에서 뽑은 게 아니다. 모두, 내가 갖고 있는 지난 시절 음반들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니 당시 디스코 영화나 뉴튼 존의 인기는 얼마나 대단했던 것일까.

 트라볼타나 뉴튼 존은 그러니까, 내 삼촌뻘 되는 세대의청춘 스타였다. 복고 취향도 이젠 한철 지난 유행이 되었는데, 나는 왜 <그리스>에 열광하는 걸까. 뮤직비디오 클립이 너무 멋져서 그럴까. 사실을 말하자면 <그리스>는 그와 비슷한 맥락의 청춘 영화들에 비하면 그 수준이 처진다. 앞선 시기의 <이유 없는 반항>이나 나중의 <광란의 사랑>의 초벌 시나리오 원고를 갖고 찍은 영화 같다. 뮤지컬 영화라지만 트라볼타는 노래를 한참 못하고 뉴튼 존은 연기를 한참 못한다. 게다가 트라볼타는 영화 내내, 뉴튼 존의 청순한 아름다움에 기가 눌렸는지 그녀의 눈을 한 번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다. 주역 연기자들이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영화는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 대니(존 트라볼타)와 샌디 (올리비아 뉴튼 존)가 하는 고민은 그들이 다니는 라이델 고교의 교가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리스>에는 흥행이라는 한 마리 토끼만을 쫓는 영화가 흔히 벌이는 속보이는 뻔한 행태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는 당시 인기 상종가였던 두 청춘스타를 기용해선, 미국 청소년들의 소비 취향을 자극하는 기호들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빨간색 스포츠카, 디스코, 슈가 팝, 그리스(튜브에 담긴, 짜 쓰는 머릿기름이다), 해외 펜팔, 혼전 섹스, 뷰티 스쿨, 드라이브 인 시어터, 자작 자동차, 프랭키 아발론(신승훈이 깜짝 출연한 영화를 떠올려 보라), 고교 풋볼팀과 치어걸들.

 이 모든 너저분하고 실망스러운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는 <그리스>에 열광한다. 사람을 열광시킬 수 있는가 장 빠르고 간편한 대중적 수단은 노래와 춤이다. 노래방과 DDR 게임방 간판이 휩쓸고 있는 우리나라 길거리 풍경만 봐도 그렇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대중적인 것은 늘 마음을 안심시켜 준다. 편안케 하고, 부담이 없다. 가볍고 경박하고 촌스런 <그리스>가 가진 힘은 바로 그것이다. 내가 잠시 <그리스>에 열광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일까. 그것이 요즘의 내게 가장 절실한 시간이다.

 

JOHN TRAVOLTA  OLIVIA  NEWTON  - GREASE
감독 랜달 클라이저 | 출연 존 트라볼타, 올리비아 뉴튼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