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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一無所有 / 추이지엔 본문

음악이야기/월드음악-샹송,칸초네,탱고,라틴등

一無所有 / 추이지엔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8. 00:34

https://youtu.be/FY4qDE16dv8

 


一無所有 / 추이지엔

나는 그대에게 몇 번이고 물었지 / 언제 나와 함께 가겠느냐고 하지만 그대는 늘 나를 비웃었지, 일무소유라고 / 그대에게 나의 꿈을 주고 / 그리고 나의 자유도 주려 하지만 / 그대는 늘 나를 비웃었지, 일무소유라고 / 오 그대는 언제 나와 함께 가려나 / 오 그대는 언제 나와 함께 가려나

발밑에서 대지는 움직이고 몸 밖의 물은 흘러가는데 / 그대는 아직도나를 비웃지, 일무소유라고 / 그대는 왜 나를 비웃기만 하나 / 나는 왜 그대를 쫓기만 하나 / 그대 앞에서 난 영원히 일무소유인가 / 오 그대는 언제 나와 함께 가려나 / 오 그대는 언제 나와 함께 가려나

발밑에서 대지는 움직이고 / 몸 밖의 물은 흘러가는데 / 고백할게, 내가 오래도록 그대를 기다린 것을 / 고백할게, 나의 마지막 청을 / 나는 그대의 두 손을 잡고 / 이제는 나와 함께 가자고 말할 거야 / 그 순간 그대의 손은 떨리고 /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겠지 / 설마 그대가 나에게 / 일무소유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나 / 오 이젠 나와 함께 가요/오 이젠 나와 함께 가요


89년 6월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젊은이들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고, 드디어는 수십만의 인파가 합창하기 시작했다. 6월 4일 일요일 새벽,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 병력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며 끝까지 톈안먼 광장을 지키던 수천 명의 시위대에게 군인들의 발포가 시작되고 광장은 순식간에 참혹한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중국 정부는 중국 인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그리고 톈안먼 광장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합창하던 그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고, 노래를 부른 가수는 오랫동안 무대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 노래가 바로 추이지엔의 <일무소유 一無所有〉였다.

추이지엔은 20세기 중국 연예계의 10대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된 중국 최초의 록 가수이다. 추이지엔은 중국의 개방 이후 급속히 변화하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고민과 진실, 이상향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노래로 표현하여 중국 젊은 세대들의 우상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추이지엔의 <일무소유〉는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표현한 연가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하지 않다. 꿈, 자유, 함께, 등의 단어가 암시하듯이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갈망이 담긴 숭고한 사랑 노래이다. 중국 공산당의 통제 하에 생산된 훈계조의 계몽가요만을 접하던 중국 젊은이들과 추이지엔 이전의 중국 가수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랑'이었다.

1970년대 김민기의 등장으로 우리나라의 청년문화가 생성되었듯이 중국에서도 추이지엔의 등장으로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중국의 청년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1960년대 문화혁명 이후 “대장정의 정신과 마오쩌둥 주석의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우울함과 무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추이지엔의 록 음악은 20여 년간 그들을 옭아맸던 우울함과 무기력증을 단숨에 날려보냈다. 그들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자유와 진보의 꿈이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감성을 억압하던 전체주의적 집단논리가 추이지엔의 노래 한곡 <일무소유>로 산산이 박살나 버린 것이다.

서구의 록음악은 기성 가치에 대해 저항하고 변혁을 추구한다. 여기에 더하여 추이지엔의 록에는 동양적 전통이 스며들어 있다. 때문에 신나고 흥겨울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풍자는 물론 기본이며, 악기도 중국전통의 악기인 고쟁 (거문고의 일종), 피리, 날나리 등과 색소폰, 전자오르간 등 서양악기를 결합시키고, 펑크, 재즈, 언더그라운드, 랩, 락, 레게 등 여러 장르의 음악적 특징과 리듬을 융합하여 흐벅진 음색을 독창적으로 표현한다.

추이지엔은 1961년 공군군악대의 트럼펫 주자인 아버지 최홍재와 조선족 무용단원인 어머니 장순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음악과 춤을 접하면서 14세부터 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트럼펫을 배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 년 베이징 아이허관현악단의 전문 트럼펫연주자가 되면서 중국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서구 록음악에 심취하고 기타와 작곡을 공부한다. 이 시기 그가 심취한 음악은 스팅, 폴리스 등의 록음악과 존 덴버, 폴사이몬의 포크음악이었다.

1984년 다른 6명의 음악인들과 함께 '치허판'이라는 밴드를 조직하여 첫 번째로 <난 알아요不是我不明白〉라는 록음악을 발표한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보컬밴드였다. 1986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평화의 해 기념음악회'에서 오프닝으로 <일무소유>를 불렀다. 당시 추이지엔은 청나라 황제 복장으로 공연을 했는데 관중들은 추이지엔의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10여 분이 지나서야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추이지엔의 앨범으로는 1989년에 발표한 첫 음반인 《신장정의 락》 (중국에선 一无所有로 발표), 1991년 2월 두 번째 음반인 《해결》, 1994년 8월 <홍기하적단 - 홍기아래서의 알》, 1998년 《무력한 자의 힘》 등 4장이 있다.특기할 것은 첫 음반인 《신장정의 락》은 중국혁명 당시의 '연안대장정'을 빗대어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자는 내용이고 《홍기하적단》은 문화혁명 당시 위세를 떨치던 홍위병을 풍자한 내용이다. 이는 추이지엔이 바로 문화혁명 이후의 전체주의적 암울한 사회 분위기에서 성장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추이지엔은 음악뿐 아니라, 중국 6세대 영화감독인 장위엔의 인디영화<북경 녀석들> 1993의 제작과 각본, 주연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낳기도했다. 이 영화는 서사기법의 영화적 구성을 넘어 생생한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톈안먼 사태 이후의 중국 베이징 하층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삶을 묘사하여 1995년 로카르노 영화제 특별상과 베를린영화제 청년비평가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지원 감독의 <귀신이 온다>의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자신의 처녀작 <처녀막 재생시대>에서는 연출과 음악을 동시에 맡았다. 그가 감독한 영화에는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한 <색을 보여드립니다>와 2008년 옴니버스 형식의 <성도, 사랑해>가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자신이 걸어온 26년 음악의 길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 <그날을 초월하다>를 제작하여 중국 전역에 배급했다. 

톈안먼 사건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톈안먼광장을 중심으로 발생한 학생, 노동자, 인민들의 반정부 시위를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가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군대를 동원하여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도 불린다.

중국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을 확립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과감히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후 10년 동안 경제개혁에 걸맞는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은 없었다. 또한 권력이 집중된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 아래에서의 경제개혁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오히려 관료와 결탁한 특권층의 부패와 비리가 만연하고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 개혁개방의 느린 속도와 그 폐해로 인해 일부 지식인들과 학생, 노동자 등 인민들은 경제적 평등과 정치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민들의 요구에 불을 당긴 것이 지식인과 학생들로부터 개혁주의자로 추앙받던 전 당총서기 후야오방의 죽음이었다. 4월 15일 후야오방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대학교에는 그의 개혁노선을 옹호하면서 보수파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고, 학생과 인민 등 수백 명이 인민영웅기념비까지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행진을 벌인다. 17일에는 베이징시 대학생 자치연합회 등으로 시위가 확대되고, 상하이에서도 시위가 일어난다. 4월 22일 텐안먼 광장 북쪽에 위치한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후야오방의 추도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인민들이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다. 무력으로 진압되는 6월 4일 새벽까지 톈안먼 광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최초의, 또 최대의 반정부 시위 장소로 바뀌었다.

이날 변방의 시안에서는 300여 명의 군중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공동 과 연합해 폭정을 타도하자'라며 성 정부를 습격하였다. 5월 13일부터 학생과 노동자 3,000여 명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가 5월 18일에는 시민, 학생 등 100만의 인파가 모여 단식농성 지지시위를 벌였다. 이에 중국 당국은 19일 밤 전격적으로 베이징시내에 군을 투입한다. 5월 20일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개혁파의 일원인 자오쯔양당총서기가 단식농성장을 방문하여 “천안문에서의 시위는 애국 열정"이라며 시위 자제와 함께 “건강을 위해 단식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바로 공식 계엄령이 선포된다. 중국 공산당 권력 투쟁에서 강경보수파인 리펑총리가 개혁파를 대표하는 자오쯔양 당총서기와 정치국 상무위원 후치리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럼에도 시위는 베이징뿐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상하이, 선양,창춘,창사 등지에서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자, 결국 중국 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일요일인 6월 4일 새벽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톈안먼의 대학살극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당시 중·소 영수회담을 취재하러 왔던 외국 기자들의 보도로 전 세계에 알려졌으며,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중국 정부의 이 같은 반인권적인 유혈진압을 강력하게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민간인 사망자 875명, 민간인 부상자 약 14,550명, 군인과 전경 사망자 56명, 부상자 7,525 명 등으로 공식 발표했으나, 국제적십자회는 사망자를 2,000여 명으로, 국제사면위원회에서는 사망자를 1,000여 명으로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톈안먼 광장에 대규모의 공안을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으며, 인터넷 중국어 검색엔진에서도 톈안먼 사건에 대한 정보검색을 차단하고 있다.

 

一無所有 / 추이지엔
톈안먼 광장에 울려 퍼진100만 인민의 합창<일무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