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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ill Meet Again (1979 Album) - Bill Evans 본문
20세기의 재즈쇼팽이 들려주는 마지막 연주
Bill Evans - We Will Meet Again (1979 Album)
재즈를 한국인들과는 끝끝내 친해지지 않는 음악 장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음악시장과 엔터테인먼트 시장도 그 규모가 세계적으로 성장했지만, 특정한 분야에만 편중된 성장이라 록이나 재즈 뮤지션들은 오히려 예전만 못한 대우를 받고 있어 안타깝다. 아직도 재즈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 채 '그들만의 리그' 되어버린 것은 사람들의 세 가지 선입가견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것, 둘째는 시끄러운 음악이라는 것, 셋째는 졸린 음악이라는 것. 가만 보면 세가지 선입견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시끄러운데 졸리다니.
물론 재즈는 어렵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하며, 졸리기도 한 음악이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릴수록 맛이 우러나는 고급차처럼 재즈는 듣다 보면 쉽고, 재미있고, 생동감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가무를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한 선입견 때문에 그 진입로가 협소해진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또 하나, 오래된 것은 구식이라며 꺼리는 최신주의'도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한몫을 한다. 노래방에서 최신 히트곡을 모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는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 덕분에 앞사람이 최신곡을 부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노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더 최근의 히트곡을 열심히 찾아 예약 버튼 누르기에 바쁘다. 거리에서는 10년 이상 된 자동차를 찾아보기 힘들고, 예전 영화나 음악을 다시 찾는 사람을 보면 특이한 취미를 가졌다고 여기면서도 IT 산업을 발전시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렇게 예전 것을 홀대하고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얼리어답터 현상을 가리켜 “유구한 역사 속에서 툭하면 빼앗기고 불타고 없어져 버리는 '오래된 것'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는 다소 비약적인 분석과 이론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재즈 이야기하다가 서두가 장황해졌다. 어쨌든 언젠가는 이 비인기 종목에도 김연아, 박태환 같은 선구자가 출현하기를 늘 손꼽아 기다린다.
"재즈를 공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수없이 많이 들은 질문이다. 요컨대, 웬만한 학술논문보다도 어려워 보이는 재즈 입문서, 재즈 총론, 심지어 '쉬운 재즈'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두꺼운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음악을 하는 나도 재즈가 싫어지는데, 보통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러니 '공부'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도 하다.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예고생이나 음대생에게 맡기자. 그냥 호감 가는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을 연주한 뮤지션의 다른 음악을 듣고, 그러다가 그 사람이 영향을 주거나 받은 다른 뮤지션의 음악을 듣고, 그러다 보면 재즈도 나의 눈높이에 내려와 있게 될 테니 괜히 1930년대는 스윙, 1940년대는 비밥 같은 식의 '공부'는 안 해도 된다.
그럼 초심자들을 위해 앞서 말한 '호감 가는 음악'을 추천하라면?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캡 캘러웨이 Cab Calloway? 베니 굿맨 Benny Goodman? 마일즈 데이비스? 수십 명의 재즈 전설들의 이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지만 왠지 처음 재즈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과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중에 과격하거나 가볍지 않으면서도 왠지 친절해 보이는 이름이 하나 오롯이 남는다. 빌 에반스 Bill Evans' ♪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재즈의 위인들 중에서 왜 하필 빌 에반스냐고? 글쎄, 왠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와 느낌이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비슷한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유난히 서정적인 발라드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에게 그는 '시끄럽고 따분하고, 어렵다'는 재즈의 선입견을 없애 줄 수 있는 친절한 관광 가이드가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만・・ 외모가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한 그의 피아노를 마음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재즈의 넓은 바다에 퐁당 빠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단 바다에 빠지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다.
에반스는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젊었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그는 건강해지기 위해 대학 시절 브라스 밴드의 플루트 주자도 하고, 미식축구팀의 쿼터백이 되기도 했으며, 군대도 지원해서 갔다. 건강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지만 군악대에서 활동하던 무렵인 1956년에 첫 솔로 앨범을 냈고, 몇년 후 마일즈 데이비스의 유명한 앨범 《Kind of Blue》에 참여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리버사이드Riverside 레이블에서 발매한 그의 초기 곡들은 '리버사이드 연작이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재즈의 교과서처럼 여겨지고 있다. 《Portrait in Jazz》1959, 《Explorations》1961,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1961,《Waltz for Debby》1961, 《How My Heart Sings》1962 등이다.
에반스의 명반을 꼽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때의 앨범들을 꼽지만 나는 왠지 정통 재즈 마니아들이 기겁하고 싫어하는 앨범인,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며 스탠더드보다는 자신의 곡들로 앨범을 채워 다소 자유스러운 그의 1970년대 앨범들이 좋다. 짐 홀, 스탄게츠, 투츠 틸레망과 만든 듀엣들, 특히 그의 짧은 생애의 후반부에 레코딩한 《I Will Say Goodbye》1977, 《You Must Believe in Spring》1977, 《New Conversations》1978, 《The Paris Concert>1979, 그리고 그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We Will Meet Again》1979을 감상할 때면 언제나 마음이 맑아지다 못해 한없이 슬퍼지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앨범 제목 'We Will Meet Again'은 음악적으로 한없이 자유롭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힘없는 에반스 자신에 대한 한 편의 슬픈 유서를 읽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린다. 그는 심각한 마약중독자였다.
언제 들어도 투명하고 아름다운 곡 <Laurie>와 <Only Child〉가 코끝을 찡하게 만들고, 그가 데뷔 시절부터 즐겨 연주한 〈Peri's Scope〉가 잠시 회상의 나래를 펼쳐 주는가 하면, 전형적인 빌 에반스표 코드 진행의 슬픈 재즈 〈Bill's Hit Tune〉이 울적함을 더한다.
또 1956년 그의 첫 솔로 앨범에 실렸던 다소 익살스러운 곡 Five가 이 마지막 앨범에도 들어 있어 '찰리 채플린 같은 묘한 수미상관의 위트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짧고도 긴 인생을 주마등처럼 덤덤하게 훑는 소품 <We Will Meet Again〉까지. 이 앨범, 아무리 들어봐도 영락없는 '작별인사'다.
흔히 빌 에반스를 재즈계의 쇼팽이라고 한다. 그의 감상적인 연주와 서정성 때문인데 한편으로 그는 재즈계의 모차르트이기도 하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초보자들이 듣기에도 좋고 클래식 마니아들이 듣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꿈과도 같은 일이지만, (나처럼) 토끼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한 사냥꾼들 역시 하루 일과가 끝나면 빌 에반스를 틀어 놓고 고단한 몸뚱이를 쉴 수 있어 좋다.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자살
에반스의 마약중독은 1950년대 말 마일즈 데이비스와 함께 연주할 때 생겼다고 한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마약은 헤로인이었는데, 몸도 약하고 재정적 상황도 좋지 않았던 에반스는 1960년대 내내 마약중독과 싸워 드디어 1960년대 말 헤로인중독에서 벗어났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번에는 헤로인보다 더욱 심각한 코카인에 손을 댔고 이번에는 헤어나오지 못한다. 결국 지병이었던 간염에 위궤양, 간경화, 폐렴, 기관지염이 더해져 숨을 거두었다. 에반스의 친구 진 리스Jean Rhys는 후에 빌 에반스의 죽음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자살" 이라고 말했을 만큼 그의 인생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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