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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October Goes / Barry Manilow / 《2:00 AM Paradise Café》 본문
감미로운 재즈 입문서
When October Goes / Barry Manilow / 《2:00 AM Paradise Café》
10월 31일, 왠지 그 어떤 달의 마지막 날보다도 애틋하고 센티해지는 느낌이다. 낙엽이 쌓이고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적인 향기에다가 그 정취를 더하게 하는 이런저런 가을 노래들을 들으면, 코트를 입고 홀로 거리를 쏘다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고엽 Autumn Leaves>이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같은 FM 라디오 단골 메뉴도 있지만, 특히 10월이 다 지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두 곡의 노래가 있다.
먼저, 1980년대에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당시 공전의 대히트를 하여 남녀노소의 심금을 울렸고, 단연 1980년대를 대표하는 국민가요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한 곡, 바로 배리 매닐로우 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 가을 무렵이면 잊힌 계절 못지않게 여기저기서 구슬피 흘러나온다. 크리스마스 때 징글벨을 듣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것처럼 10월의 마지막 날에도 예외는 없다. 발라드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이 두 곡 중에 한 곡은 필시 애청곡으로 삼고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가끔 "재즈나 클래식, 혹은 록 음악과 친해지려면 어떤 음악을 먼저 듣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는다. 심지어는 바빠죽겠는데 CD 가게에서 건 지인들의 전화를 한참이나 받아야 하는 상황도 자주 있다. 록이나 클래식은 질문하는 사람이 나 상황에 따라 그 대답이 계속 달라지지만 재미있게도 재즈만큼은 일종의 '모범답안이 있다. 별처럼 수많은 재즈 음악 중에 대략 5~6장의 앨범으로 재즈를 소개한다는 것은 대략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무모함이지만 어쩔 수 없다. 소위 재즈 입문이나 초심자를 위한 재즈' 이런 유의 책에 나오는 앨범들은 너무 많고, 또 너무 어려우니 말이다. 그 5~6장 앨범의 아티스트 중 재즈와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가수가 한 명 있으니 바로 미국의 국민가수 배리 매닐로우다.
우리말로 '성인가요쯤 되는 'Adult Contemporary' 라는 장르, 국내에서는 성인가요가 트로트를 지칭하는 데 비해 외국에서의 성인가요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느릿느릿한 발라드나 중간 템포의 춤곡이라고 보면 된다. 배리 매닐로우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가수로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군림해 왔다. 다소 비약이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매닐로우의 위상이 우리나라의 송대관이나 현철쯤이라고 보면 되려나? 세 분 모두 이 이야기를 들으면 화내실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배리 매닐로우는 미국인들이 끔찍이 사랑하는 가수다.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 후 방송국에서 일하던 매닐로우는 몇몇 CM송을 히트시키며 20대를 보낸다. 그러다가 가수이자 배우인 베트 미들러 Bette Midler의 음악 선생으로 초빙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했고, 1973년 데뷔 앨범을 발매한 이래 매년 발표한 앨범 4장이 모두 히트를 기록해 일약 인기가수로 급부상 했다. (Could It Be Magic), (Mandy), (Looks Like We Made It), (Day break), (I Write The Songs) 등의 감미로운 노래들이 매닐로우의 달콤하고 편안한 목소리와 피아노에 실려 전 세계로 스멀스멀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970대 말에도 (Ships), (Even Now), (Can't Smile Without You〉에다 디스코 열풍에 부응한 〈Copacabana)까지, 매닐로우의 곡들은 발표되는 족족 히트했으니 야구에 안타 제조기'가 있다면 팝계에는 '히트곡 제조기'로 배리 매닐로우가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아리스타 Arista 레코드의 25주년 기념공연에서 그의 빌보드 1위곡만으로 메들리를 만들어 두어 소절씩만 부르는 것을 DVD로 봤는데, 웬만한 노래 한 곡보다 길었으니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다.
그렇게 황금의 1970년대를 보낸 배리 매닐로우가 1984년 흥미로운 앨범을 한 장 낸다. 바로 가을이면 라디오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오는 〈When October Goes>가 담긴 《2:00 AM Paradise Café》다. 자신을 한적한 재즈 바에서 연주하는 삼류(?) 피아니스트로 설정하고, 시종일관 느릿느릿한 템포의 재즈 발라드만 부른 앨범이다. 자칫 매닐로우의 야심 찬 재즈 짝사랑으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재즈계 헤비급 거장들의 도움으로 무게가 실리는 바람에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매닐로우의 다른 앨범들에 비해 유행을 타지 않는 앨범이 된 것이다. 여기서 재즈의 거장들이란 바로 먼델 로우 Mundell Lowe(기타), 빌 메이즈 Bill Mays (피아노), 제리 멀리건 Gery Mulligan (바리톤 색소폰), 그리고 이제는 모두 유명을 달리한 전설적인 가수 사라 본 Sarah Vaughan과 멜 토메 Mel Torme였으니, 천하의 배리 매닐로우지만 이들 틈에서는 필시 위축감을 느꼈으리라.
《2:00 AM Paradise Café》의 특이사항은 모든 곡이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곡풍도 다 비슷비슷한 슬로우 재즈라 혹자는 초심자에게 이 앨범을 추천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지겨워서 재즈에 정 떨어질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누구인가? 록 밴드의 앨범을 들어도 그중에 발라드 한 곡만 꼭 집어서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전 곡 발라드, 게다가 가사도 전형적인 유행가식 사랑 타령인 《2:00 AM Paradise Café》를 싫어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이 앨범은 꽤 많은 재즈 평론가나 연주자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아온 악명 높은 앨범이고, 나도 언젠가부터 이 앨범만 들으면 졸음이 몰려와서 잘 듣지 않게 된 것이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재즈 뮤지션과 함께 연주하면 다 재즈냐?" 식의 악의에 가득 찬 발언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매닐로우를 향한 일종의 시샘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에게 <Where Have You Gone〉, 〈Paradise Café>, <When October Goes>가 아름다운 재즈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노래가 진짜 재즈냐고 반문하고 싶다. 멜 토메와 함께 부른 (Big City Blues), 사라 본과의 듀엣 <Blue>처럼 고수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앨범의 백미는 언제 들어도 감탄을 자아낸다.
얼마 전 어느 시상식장에 나온 배리 매닐로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톡스 주사를 과잉으로 맞으셨는지 얼굴.이 산타클로스처럼 "탱탱 · 똥그 · 붉으스래" 했는데, 여기저기 펴지지 않은 주름이 오히려 사람을 더욱 늙어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하긴 매닐로우 아저씨도 우리 나이로 칠순을 넘겼으니 이제는 할아버지시지. 보톡스의 ㅂ자도 모르고, 백만장자도 아닌 데다, 평생 남편 내조에 아이 다섯 키우느라 고생하시며 자연스럽게 늙으신 1942년생 말띠 동년배 우리 어머니와 비교해 보니 돈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에는 일찍 귀가해 엄마가 좋아하시는 배리 매닐로우의<Mandy>를 들으며 저녁식사나 같이 해야겠다.
글쓴이 : 권 오섭 - 작곡가 겸 프로듀서
♪부상병동 매닐로우
매닐로우는 평생 병원 신세를 자주 지기로 유명한 가수이기도 하다. 그가 올림피아 극장 공연 리허설에서 발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도 대충 붕대만 감고 디스코 <코파카파나> 의 안무를 소화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늘 빡빡한 스케줄과 투어 등으로 기관지염, 폐렴 등에 시달렸던 그가 2006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을 때는 황금색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양쪽 엉덩이 연골 수술을 받은 직후였다고 한다.
♪ 거장들이기에 가능했던 단 한 번의 녹음
《2:00 AM Paradise Café》 앨범은 LA의 한 스튜디오에서 사흘간의 연습 후 단 한 차례의 라이브 녹음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3분짜리 곡도 오버더빙 overdubbing (이미 녹음된 연주를 재생시키면서 새롭게 다른 트랙에 다른 연주를 녹음하는 것)과 펀칭 (노래의 특정한 부분을 반복하여 다시 녹음하는 기술)을 통해 다듬기 마련인데, 러닝타임 50분에 달하는 연속되는 11곡을 이른바 '삑사리' 한 번 없이 단번에 녹음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앨범에 참여한 재즈 뮤지션들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음악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보는 듯한 요즘의 녹음 실태를 생각해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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