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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all in Love Too Easily / Chet Baker 본문
백조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마지막 노래
I Fall in Love Too Easily · Chet Baker
1988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서울 올림픽의 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호주 사람들은 88 브리즈번 만국박람회'를 떠올릴 것이다. 이란 사람들에게는 수백 명의 이란인들이 탄 비행기가 미국 전투기의 미사일에 피격된 비극적인 해로 기억될지 모른다. 한편, 음악 산업 역사에서 1988년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처음으로 CD가 LP 판매량을 추월한 해가 바로 1988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mp3라는 괴물이 나타나 CD의 시대는 20년도 채 못 갔으니, 앞으로 10년 후면 우리는 어떻게 음악을 듣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1988년은 재즈 팬들에게 슬픈 해였다. 트럼펫의 풍운아 쳇 베이커 Chec Baker가 암스테르담에서 돌연사한 것이다. 쿨 재즈의 왕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그가 은둔기를 끝내고 재기에 성공,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창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을 때라 더욱 충격이었다. 자신이 머물던 호텔 방 창문 아래 길바닥에서 헤로인과 코카인을 복용한 채 머리에 외상을 입고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한 네덜란드 경찰은 사고사로 처리하고 시신을 미국으로 보냈다. 으레 그러하듯이 자살과 타살에 대한 의문과 의혹이 증폭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쳇 베이커의 명성은 수많은 재즈의 거성들 사이로 사라져 희미한 전설이 되어 버렸다. 당시 그의 나이 69세였다.
록 음악에서는 여자 보컬을 찾아보기 힘든 반면, 재즈에서는 여자 가수가 남자 가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연주자들이 대부분 남성인 까닭에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밴드에서 여자 보컬이 화룡점정'을 찍는 것이 재즈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재즈의 대부' 루이 암스트롱처럼 연주와 노래를 함께 소화하는 남성 연주자의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쳇 베이커는 그 방면으로 독보적인 뮤지션이다. 어떤 이들은 쳇 베이커가 트럼펫 연주자라는 사실을 종종 간과하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그의 보컬은 한번 들으면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쳇 베이커가 가창력이 우수한 훌륭한 가수일까? 이 질문에는 쳇 베이커의 골수팬들조차 고개를 가로저을 공산이 크다. 베이커의 목소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데 아주 적절한 말이 있으니 바로 어눌하다'라는 형용사, 도대체 입을 반도 안 벌리고 중얼거리듯이 노래하는 스타일하며, 그다지 높지도 않은 고음에서 이른바 삑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하는 대범함에다 라이브에서는 종종 트럼펫 불다 입술 아프면 노래하고, 노래하다가 목 아프면 트럼펫 부는 무심함까지. 관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연주하는 그의 수많은 앨범들은 모조리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듯 계속 듣고 듣고 또 듣게 된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도 그의 노래처럼 화려한 기교나 파격없이 덤덤하고 선명해서 오히려 질리는 맛이 덜하다. 그의 100장이 넘는 이런저런 앨범들은 지금도 재즈 마니아 층을 넘어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쳇 베이커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바를 들어서면서 누군가 그랬다. “아, 여기도 글루미 첫 데이구나!"
그가 죽기 2주 전 프랑스 파리에서의 공연 실황인 《My FavoriteSongs, vols. 1-2: The Last Great Concert) (Straight fromThe Heart: The Last Great Concert vol. 2>는 얄팍한 상혼인지 제작상의 문제였는지는 몰라도 애초에 반으로 나뉘어 따로 제작되었는데, 요즘 나온 음반은 두 개가 합쳐져 그냥 《The GreatLast Concert》로 묶여 있기도 해 언제부터인가 vol. 1과 vol. 2를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
이 앨범은 쳇 베이커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이례적으로 오케스트라와 재즈 빅밴드,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허브 겔러Herb Geller가 이끄는 스몰 밴드 모두를 무대에 세워, 마치 이별을 위한 성대한 환송 파티를 방불케 하는 콘서트였다. 앨범 제목인 'My Favorite Songs'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퍼토리도 그가 평소에 좋아하고 즐겨 연주하던 곡들로 가득 채워 넣어 흡사 앙코르만 열댓 곡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하다. 특히 수많은 뮤지션들이 수없이 노래하고 연주한 고전(My Funny Valentine)을 듣고 있노라면 죽기 전에 단 한 번 구슬프게 노래한다는 백조의 전설이 떠오르면서 가슴 한구석이'짠해진다.
비슷한 또래의 트럼펫 주자이자 재즈와 대중음악계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 <All Blues〉와 〈Sippin'at Bells)에서는 트럼펫 주자로서 쳇 베이커가 가지는 굵직한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데, 베이커가 세상을 뜬 뒤 몇 해 되지 않아 희대의 트럼펫 주자 마일즈 데이비스도 폐렴으로 그를 따라간다. 주류와 비주류 모두 죽음 앞에서는 평등한가 보다.
데이브 브루벡Dave Brulbeck의 <In Your Own Sweet Way>, 델로니어스 몽크 Thelonious Monk의 Well, You Needn't), 그리고 조지 거슈인 George Gershwin의 고전<Summer time>에서는 쿨 재즈 <1948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내성적이며 약간 찬 듯한 느낌을 주는 모던 재즈>의 깔끔함을 맛볼 수 있고,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에서는 쳇 베이커의 전매특허인 어눌하고 우울한 노랫소리를, <Tenderly>에서는 목소리 못지않게 처량한 그의 트럼펫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예전부터 첫 번째 앨범의 마지막에 들어 있는 <I Fall in Love Too Easily>가 좋았다. 특히 곡이 끝나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우뢰와 같이 나오는 박수가 좀 심하다 싶게 길게 이어지는 것을 끝까지 챙겨 듣고는 한다. 그리고 마약과 세월에 찌들어 주름 패인 쳇 베이커의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모습을 그려본다.
마약 중독, 도피와 은둔, 심지어 감옥살이까지 삶의 질곡이 남부럽지 않게 깊은 그였지만, 죽기 2주 전에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박수갈채를 받고 감격했을 늙은 뮤지션의 마음을 어렴풋이 짚어 본다. “죽어도 여한이 없었겠구나!"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에로이카 교향곡>, 그리고 쳇 베이커의 마지막 콘서트에서 듣는 이 기나긴 박수 소리는 역시 훌륭한 음악이란 훌륭한 뮤지션이 만들지만, 완성은 훌륭한 관객이 한다'는 평범하고도 위대한 진리를 알람시계처럼 우리 귀에 울려 준다.
.# 마약이 무엇이기에,
쳇 베이커의 마약 경력은 너무나 지저분해서 화려할 정도다. 20대 초반부터 혜로인에 중독된 그는 독일, 영국 등에서 마약 혐의로 추방당하기를 밥 먹듯이 했고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는 징역도 살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미국이 한 뒷골목에서 마약을 사려다 시비가 붙어 불랑배들에게 구타를 당했는데, 앞니가 다 부러지고 입술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맞아서 그의 음악 생활이 끝장날 뻔했다. 관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에게 앞니와 입술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베이커는 이후 의치를 끼고 트럼펫과 프루겔 혼을 다시 연습해야만 했다.
# 쳇과 마일즈
쳇 베이커 정도로 유명한 뮤지션이라면 주류로 분류되어야 하겠지만, 마일즈 데이비스가 화려한 대규모 공연과 레코딩으로 이런저런 상도 줄기차게 받으며 재즈 슈퍼스타로 군림하는 동안 쳇은 걸핏하면 경찰에 체포되고, 유럽으로 도망가거나 '잠수'를 타고, 어쩌다 조그만 바에서 게릴라 식으로 연주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 둘은 흡사, 평생 부와 명성 속에 살았던 피카소와 불행하게 살다가 요절한 모딜리아니, 미술계의 이 두 라이벌을 연상시킨다.
#. 군대 두 번 간 쳇 베이커,
대한민국 예비역 남자들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쳇의 과거가 있다. 쳇 베이커는 고등학교 시절 학업에 별 흥미가 없었는지 돌연 학교를 자퇴하고 군에 자원입대한다. 그는 독일로 배치되어 군악대에서 2~3년간 트럼펫과 트롬본을 불며 군생활을 하게 되는데, 비록 군인이었지만 다양한 음악적 경험과 자유로움을 만끽했고, 그 후 평생 유럽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대 후 LA의 한 음악대학에 입학했지만 1년 남짓 다닌 후 또다시 학교를 때려치우더니 다시 군에 입대한 쳇 베이커. 이번에는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의 군악대에서 활동을 했지만, 수많은 재즈클럽들의 러브콜을 받고 또다시 제대, 비로소 프로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끝까지 마치지 못했고 군대도 두 번이나 간 재미난 경력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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