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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싫어한 베르디 본문
독일을 싫어한 베르디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나라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에서 활발하게 발표된 교향곡이나 실내악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듯 보인다. 오페라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에 로시니가 등장하면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유럽 음악 무대를 장악한다. 이후에도 도니제티, 베르디와 같은 작곡가가 배출되어 오페라에서 차지하는 이탈리아의 지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스페인을 제외하면 근대화가 가장 늦은 나라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일어권에서는 교향곡이 음악 장르의 중심을 차지했고, 그밖의 실내악 작품이나 피아노 소나타 등의 기악 작품이 우세를 보였다. 그리고 19세기에 독일, 프랑스, 영국은 피아노 음악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근대 시민사회로 들어서면서 피아노가 시민사회의 악기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탈리아는 국가의 근대화가 늦어진데다가 시민사회의 근대화도 늦어져, 피아노가 시민사회의 상징적인 악기로 아직 자리잡지는 못했다. 이는 이탈리아인 작곡가가 만든 피아노 작품이 매우 적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탈리아 근대사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1848년 3월혁명에 따라 북이탈리아에서는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는 국가의 독립과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작곡가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년)이다.
1848년의 이탈리아 독립운동은 라데츠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라데츠키는 점령군의 총독으로서 이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 라데츠키를 찬양한 곡이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다. 이후 사르데냐의 국왕으로 즉위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Vittorio Emanuele)는 국제관계를 이용하여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유리하게 이끌어 크림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측에 서서 참전하였다.
1859년 1월 15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의회를 소집한다. 이 소집이 계기가 되어 이탈리아 독립운동은 다시 한 번 불이 붙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연합해 독립전쟁을 벌여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1861년 2월에 이탈리아 왕국의 독립이 선언되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취임한다. 이후의 선거에서 베르디는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베르디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는 재상인 카블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베르디가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에 솔선하여 참가한 이래, 이탈리아 독립을 위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 '베르디(VERDI)'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의 머리글자와도 일치하여 베르디는 애국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1866년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 측에 가담하여 참전한다.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령이었던 베네치아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고, 1870년에는 로마 교황령을 점령하여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마침내 이탈리아 통일을 이뤄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이탈리아 통일이 달성되었는데, 이탈리아의 근대화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이 국가 통일을 위한 최대 과제였으며, 이후 반(反) 오스트리아 정책을 취하면서 프로이센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에 호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보불전쟁) 때 이탈리아인의 감정은 반 독일 정서였다.
이 보불전쟁에서 베르디는 프랑스에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베르디는 "프랑스의 자유와 문명이 무너지면 우리의 다양한 자유와 문명도 무너진다"고 말하며 2,000프랑을 프랑스 부상자를 위해 기부하는 한편, 독일의 강압적인 정치와 군대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베르디는 이 보불전쟁에서 “1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협력했다면 프랑스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도 말하며 독일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오페라 <아이다>에서 아이다의 아버지 에티오피아 왕 아모나스로가 포로로 잡혀 쇠사슬에 묶여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은 나폴레옹 3세를 연상한 것이라고 한다. 베르디의 반 게르만 사상은 음악 면에서 반 바그너 사고로 증폭되어 갔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초연되었을 때, 베르디는 바그너에게 혐오감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국가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생각할 때 독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베르디는 독일을 싫어했지만 독일 음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음악에서 바그너가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베르디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그너의 작곡 사상이나 작곡법에 대한 서적을 연구했으며, 오페라 창작에 기존의 번호 오페라 (아리아 등의 각 곡에 번호를 붙이는 전통적인 오페라 작곡 방법)를 증지하고, 바그너처럼 일관되게 줄거리가 흐르는 서법을 도입했다. 바그너에 대한 그의 생각이 표현된 것이다.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이탈리아어: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년 10월 10일 - 1901년 1월 27일)은 이탈리아의 작곡가로, 주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그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이다. 베르디의 작품은 세계 각지 유수의 오페라 극장에서 자주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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