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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 박인희 본문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잊지 못하지…………
박인환 시인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그의 마지막 시의 첫구절입니다. 박인환은 이 시를 쓴 일주일 후인 1956년 3월 20일 밤, 3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시의 원래 제목은 '세월이 가면'인데 한때는 '명동 엘리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이 노래가 불리면서 첫 구절인 지금 그 사람이름은 잊었지만'이 제목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월이 가면」은 1960년대 서울 명동의 어느 선술집에서 박인환 시인이 술상 앞에서 즉흥적으로 휴지 조각에다 시를 써 읊조리자 당시 작곡가 이진섭씨가 즉석에서 곡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래는 당시 유명 가수 나애심이나 테너 임만섭이 처음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현인이 이 노래를 부른 최초의 가수입니다. 그러나 현인의 노래로는 별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서정적인 음색의 가수 박인희가 노래하여 시인 박인환과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음악과 시'가 만나는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이후 이 노래는 크게 인기를 얻고 유행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많은 주객(酒)의 입에 자주 불리어지는 꽤나 낭만적이고 저급하지 않은 곡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가 자신이 부를 수 있는 레퍼토리로 오르게 되면 제법 고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노래의 고상함이나 저급함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가 풍기는 그 아스라한 추억과도 같은 시상과 누구나 젊은 날에 열병처럼 앓아 본 사랑이라는 것에 관해서 먼 훗날 귀밑머리 희끗할 즈음, 이와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죄어지는 느낌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군들 사랑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군들 그 사랑으로 인해 눈물 한 번 흘려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풋사랑이든, 빗나간 사랑이든, 그 사랑이 이처럼 이제는 지나가버린 옛일이 되어 버렸을 때, 아, 정말이지 이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랑이 되었을 때… 그것은 아름다움보다는 슬픔입니다. 그 슬픔을 박인환 시인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벽 사이를 걸으면서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사랑스런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오랜만에 추억들이 와락 봇물처럼 달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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