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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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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한국음악

왜 나이가 들면 트로트가 좋아지는가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8. 01:24

https://youtu.be/anoc_fc5j_E

왜 나이가 들면 트로트가 좋아지는가

 

원더풀 청춘!.

질문에 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포크와 록을 즐기며 트로트를 촌스럽다고 여기던 지금의 중년들이, 왜 나이가 들면서 트로트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여기에 앞서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해봅시다. 도대체 언제부터 트로트는 나이 든 사람들 혹은 촌스러운 사람들의 노래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이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습니다.

앞서 식민지 시대와 전쟁기까지는 신파적인 태도의 트로트가 매우 세련된 당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질감이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자학적이고 패배주의적 눈물을 흘리는 것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이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인 남인수의 노래였으니까요.

산업화가 본격화되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1960년에 우리는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경험을 합니다. 대통령이 왕, 국부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농민의 아들임을 자처하고 나와 1961년에 정변으로 집권한 40대 청년 장교 박정희는 국가 주도의 급격한 산업화를 몰아붙입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하는 노래가 바로 5·16 군사정변 1주년 기념식에서 처음 불렸습니다. 운명을 탓하며 눈물만 흘릴 수 없다는 생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때부터 대중가요가 밝아집니다. 1960년대의 대중가요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노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한명숙, <노란 샤쓰의 사나이>, 1961년)의 유행이 이를 말해줍니다. 여자 가수가 나와서 나는 당신이 좋아'라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노래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대중가요에서 '죽어도 못 보내'를 직설적으로 외치는 감각으로 보자면, 이런 노래가 최초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쓸데없이 눈물만 징징거리면서 '운명의 장난이다. 내 죄다', 내가 못난 탓이다'라고 탄식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고 촌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슬픔이 절제되기 시작합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 밤거리에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하는 1964년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을 보면, 뒷골목 거리의 자식'임이 분명한 주인공은 당당합니다. 게다가 눈물은 겉으로 흘리지 않고 씹어 삼킵니다. 캬아! 이 싸나이'다운 태도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 '싸나이' 티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손발이 막 오그라들기는 합니다만,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에 비하면 얼마나 당당해졌습니까.

여기에서 한 술 더 뜨면 김상국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에서처럼 쥐뿔도 없으면서 큰소리도 치고, 태산이 높다 해도 못 오를 게 무어냐 (중략) 자빠져서 코를 다쳐도 울지 않겠다 / 앞만 보고 올라가는 나는 곰이다' 최희준, 〈나는 곰이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김용만, <회전의자>)를 넘어서서, 노인들까지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을 노래하는 데에 이릅니다. 희망과 낙관이 넘치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여자들의 슬픈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현미, <보고 싶은 얼굴>),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패티김, <초우>>의 가사를 들어보면, 슬픔이 절절하기는 하지만 트로트의 청승스러움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자학과 자기 연민도 없습니다. 슬픔과 고독이 너무나 멋져서 따라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세련된 스탠더드 팝을 부르는 여자 가수들의 기세 못지않게, 1960년대 중반에 뜬 이미자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녀 때에는 멋진 도시 생활을 즐겼을지 몰라도, 결혼하고 시부모 모시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이미자, <여자의 일생〉) 같은 트로트의 태도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대도시는 근대화의 가속을 밟고 있지만 가정주부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삶을 살았고, 아직 대도시의 근대화에 동참하지 못한 시골 사람들이나 저학력자들, 세상에 자신감이 없어진 나이 든 사람들 역시 신파적 비애감을 지니고 살았을 겁니다.

나이 들고 촌스러워진 트로트

신파적 트로트는 세상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즐기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트로트에는 갑자기 시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드디어 트로트가 촌스러움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트로트는 식민지 사대에 비해 월등하게 대중화되었고, 그에 비해 미국풍의 스탠더드 팝은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습니다. 대도시의 젊은 고학력자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스탠더드 팝을 좋아했지만, 그것이 완전히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식민지 시대에 트로트가 세련된 음악의 자리를 차지하고 신민요가 그것에 비해 약간 향토적인(다시 말해서 촌스러운 음악으로 취급되었던 것에 비해, 1960년대에는 세련된 새로운 음악의 자리를 스탠더드 팝이 차지하고 약간 향토적이고 촌스러운 음악의 자리를 트로트가 차지했습니다. 스스로 세련되었다 자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트로트를 점점 낙후한 음악으로 대도시의 젊은이들은 나이 든 세대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트로트를 구식으로 취급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가 되면 더욱 심해집니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이 시대가 되면 또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게 됩니다(그게 바로 청년문화세대, 곧 세시봉 세대입니다). 청년문화 세대는 아예 트로트를 경멸하는 데에 이릅니다. 트로트의 청승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지요.'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반문하는 태도를 가진 세대였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돈을 따라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죄의식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개 같은 세상' 에 대해 돌을 던지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나만의 순수한 진심을 오롯이 간직하고 살아가겠노라 절제된 마음을 다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왜 바보처럼 내가 죄인이다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치고 청승을 떠냐고요.

이제 트로트는 아예 희화화의 대상이 됩니다. 젊은 대학생이 술자리에서 목소리를 꺾어가면서 트로트를 부르면 사람들은 까르르 웃어버립니다. 그 분위기에 젖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청승스러움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 대학생이 송창식의 새는 이나 사랑이야 를 부르면 좌중은 웃지 않고 감동스럽게 경청했을 겁니다. 이들 청년문화 세대들에게 트로트의 신파적 태도는 좀처럼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난 엄마,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지요.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 했던 청년들도

그런데 이들이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트로트가 귓전에 맴도는 현상을 겪습니다.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하는 청승기가 호소력 있게 다가오고,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의 가사를 들으며 울컥하는 경험을 합니다.

제 해석은 이렇습니다. 청년문화 세대들도 드디어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세상에 스스로 굴복하면서 사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0대와 20대까지는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 거라고, 안 되면 세상을 바꾸겠다. 고 생각했지요. 부모들처럼 바보같이 살지는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30이 넘어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늙은 부모의 생계까지 책임지며 살아가게 되면서,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전혀 옳지 않은 짓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세상에 저항도 못하고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굴욕적이고 바보 같은데 어쩔 수 없습니다. 부당한 직장 상사의 강압에 찍소리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주잔에 울분을 털어 붓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드디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강압적 세상에 스스로 굴복하면서 내가 바보다', '힘없는 내가 잘못이지 누구 탓을 하겠냐', 다 내 죄다' 하면서 자학하고,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이 한없이 불쌍해져서 괜히 꺼이꺼이 울고 싶어 지고,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하는 짓이 똑같습니다. 이러니 신파적 트로트가 가슴을 울리는 거지요.

세상이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세상은 늘 '타향'입니다. 지금 이 땅에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라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들으며 가슴이 울컥하지 않는 40~50대가 몇 명이나 될까요. '오늘 내 입에 밥이 들어간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불안한 시대,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고생했는데 내가 더 뭘 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드니 트로트가 저절로 귀에 들어오는 겁니다.

단지 옛날 트로트의 질감이 귀에 낯설기는 하지요. 혹시 그 소리가 낯설어서 트로트를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영애가 리메이크한 <타향살이 > 무반주 버전을 들어보세요. 한영애의 <타향살이> 리메이크는 두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곡마단 음악처럼 다소 즐겁게 편곡했고, 다른 한 곡은 원래의 내용대로 아주 청승스럽게 불렀습니다. 청승스러운 곡은 반주가 전혀 없고 여름밤의 개구리 소리가 한영애의 노래를 받쳐줍니다. 경기도 장흥의 논바닥에서 녹음한 그 노래에서 한영애는 이 시대 중년들의 허허롭고 외로운 마음을 참으로 처량하게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부모 세대를 마음으로 껴안고 있습니다.    - 이 영미의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중에서 -

 

부마항쟁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