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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데이비드 길모어 David Gilmour의 섬에서 On An Island(2006년) 본문

음악이야기/록,블루스,R&B

데이비드 길모어 David Gilmour의 섬에서 On An Island(2006년)

김현관- 그루터기 2023. 3. 2. 00:12

https://youtu.be/r49ehE3bU94

 

 

지평선에 서서 달그림자를 바라보다
데이비드 길모어 David Gilmour의 섬에서 On An Island(2006년)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이벤트이긴 하지만, 펜더 기타에 관한 한 가장 뛰어난 연주자라고 영국인이 손꼽은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는 핑크 플로이드의 전성기에 남긴 업적만으로도 지구적 단위의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핑크 플로이드라는 이름과, 그들의 음악 언어가 갖는 의미와 무게는 20세기 다른 록 그룹들과는 조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세계를 표현해 온 그들의 음악에서(특히 『더 월The Wall에서) 전쟁, 인종, 마약, 섹스, 폭력, 교육, 고립, 전체주의 등 현대 세계의 모든 문제를 집약시킴으로써 그 어떤 역사나 철학 분야 저작 이상으로 세계인에게 지대한 정신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 중심에 로저 워터스Roger Waters와 데이비드 길모어가 있었습니다. 특히 기타리스트로서 데이비드 길모어가 지닌 진면목은 노장이 되어갈수록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데이비드 길모어는 엄숙 주의자처럼 보이는데 음악의 지위와 명예에 깊이 천착하며 비타협적으로 느껴지는 인상 때문일 겁니다. 사실 그는 초현실적 세계와 인간 내면의 풍경을 상징과 다양한 은유로 표현하는 일종의 인상주의자입니다.

핑크 플로이드 시절 그룹에서 음악적 중심을 놓고 갈등하던 로저 워터스가 개인적인 내면의 외상을 사회 모순과 병치하며 혐오와 분노의 언어를 주저 없이 갈파하는 음악 세계를 고집할 때도 데이비드 길모어는 음악과 음향 자체의 조용한 미학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였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에 따른 핑크 플로이드의 '이산' 이후에도 이러한 양상은 변함이 없고, 22년 만에 솔로 앨범을 발표한 데이비드 길모어는 날이 날카롭게 선 예술가가 아니라 인생과 자연의 숨은 언어를 담지하고 성찰하려는 지향을 보입니다. 물론 이는 대부분의 록 뮤지션이 장년 이후 걷는 공통된 길이기도 하지만 (존 로드가 대표적인 경우이겠지요). 중요한 점은 무겁고 진지하면서도 지구적 보편성을 띠는 음악 언어를 추구하는 데이비드 길모어의 현재입니다.

「섬에서 On An Island」를 통해 그는 블루스에 뿌리를 둔 록 기타리스트로서 기타 한 대를 둘러싼 앙상블에 얼마나 많은 동시대의 표지들이 압축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줍니다. 잔잔한 오케스트라가 밤의 해변처럼 자리 잡고 마치 푸르스름한 달빛처럼 그 울림이 공중에 퍼지는 기타와 서늘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오버 더빙된 목소리, 특유의 느리고도 스케일이 큰 수록곡마다 1960년대부터 40년 이상 기타를 연주하고 작곡을 한 대가의 중후한 풍모가 담백하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단지 펜더 기타의 일인자가 벌이는 퍼포먼스의 등급에만 집착한다든가 혹은 사회적 메시지가 약하다는 '선수'들의 냉정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데이비드 길모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담았습니다. 게다가 신중한 태도로 대가의 풍모를 흩뜨리지 않고 담아 놓았기에 훌륭하고 아름답습니다. 여지없이 '달'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섬에서 On An Island」에는 밤이라는 공간, 텅 빈 도시, 달과 별의 한기와 온기, 자연의 흐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등이 하나의 잠언처럼 담겨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전쟁과 폭력, 혼돈과 광기는 지구를 언젠가 완전한 몰락으로 이끌 것입니다. 예술가는 깊은 밤, 달과 별에게 이를 놓고 탄식합니다. 과학자와 정치가가 지구 생명이라는 테제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현대사와 함께 호흡해 온 동시대 예술가들의 진심 어린 탄식과 찬미는 왕왕 과학과 정치를 뛰어넘어 자연 그 자체에 도달합니다. 22년 만에 세상에 선보인 데이비드 길모어의 앨범에는 어쩌면 머지않아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를 더 못 보게 될 안타까움과 초월 사이 어떤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혹은 달과 별과 검푸른 밤하늘을 노래하고 또 다른 우주를 지향하며 고요히 기다리는 자연주의자의 명상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실험을 앞세워 실력 이상을 보이려는 건 진기함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고 곧 사라질 뿐이다."

이 말은 거장으로서 젊은 세대 음악인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충고입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튀는 행동으로 실력 없음 (사실은 생각도 별로 없는)을 위장하는 퍼포먼스 위주의 밴드가 가끔씩 돌출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미국이 GNP의 하찮은 부분을 떼어다 굶주리는 나라에게 던져 주는 꼴을 못 보겠다."

2005년 아프리카 극빈국의 부채 탕감과 기아 문제를 세계에 일깨우기 위한 'Live 8 공연에 참가하면서 일갈한 이 한 마디는 명불허전인 팝 뮤지션의 성찰이 어디까지 닿는가를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극빈국을 돕는 일은 온정이 아니라 정의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이 앨범에는 폴란드의 영화 음악가이자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삼색』 시리즈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음악을 작곡한 즈비그뉴프라이즈너Zwignew Preisner가 오케스트레이션을 맡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레이엄 내쉬Graham Nash, 데이비드 크로스비 David Crosby, 리처드라이트Richard Wright 등 기라성 같은 음악인이 함께 참여하여, 조용한 성품과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인생관의 공명 안에서 동시대의 따뜻한 메타포를 낙엽처럼 혹은 썰물처럼 남겨 놓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세계라는 거대한 굉음에 의해 부서져 가는 개인의 가슴과 영혼 에그의 음악이 다가옵니다. 진정한 음악의 에너지가 발휘되는 곳은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나 정치인의 취임식이 아닌 피폐하고 고독한 한 사람의 내면, 그 메마른 오솔길, 아득한 지평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