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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어머니 손은 '약손' 본문
어머니 손은 '약손'
세상에서 으뜸 가는 어머니
어느 날, 가을 들녘이 보고 싶어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어느 수도원의 손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제치고 창문을 여니, 가을하늘 아래 뜰 가득히 피어난 코스모스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그 모습이 얼마나 청초하고 아름다운 지 잃어버린 옛 고향집을 다시 찾은 듯했습니다. 어릴 때, 그러한 아름다운 뜰이 있는 집에서 살아본 일이 없건만, 내 마음의 고향, 어머님의 모습이 그 꽃밭에서 미소짓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에는 분명히 그렇게 수려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 나를 있게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신 분, 나를 위해서는 열 번이면 열 번 다 목숨까지도 바쳤을 분,그런데도 나는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어머니는 가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씀의 뜻을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내 몸에 느껴 알게 되었습니다.
40여 년 전, 독일에 있을 때에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정초에 독일 국회에서 한 연설을 방송으로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독일, 독일,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독일……………… 우리 독일 국가의 뜻은 결코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제일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머니 같은 존재요, 어머니가 비록 객관적으로는 평범한 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세상에서 으뜸 가는 어머니이듯이, 그렇게 우리 독일도 우리에게는 으뜸이라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나에게도 우리 조국 한국이 으뜸이고, 우리 어머니가 세계에서 으뜸 가는 어머니입니다.
母港과 같은 분
어머니는 내가 막내였기 때문이었겠지만, 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식이란 크면서 어머니의 품을 떠나고도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가끔 갈등을 느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너무 사랑하는 듯해서 그게 싫어졌고, 어머니한테서 해방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럴 무렵에, 학병에 끌려가게 되었고, 하던 공부도 철학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했고, 만일 죽는다면 어머니가 보지 않는 먼 곳에서 죽고 싶었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죽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실 것을 차마 보지 못할 듯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병으로 나가 막상 죽을 위험에 임박한 지경에 이르러, 나는 정반대로 어머니가 보고 싶고 어머니 품에서 죽고 싶은 강렬한 소망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 경험은 태평양 한 가운데에 떠 있던 배위에서였습니다.
그 때, 우리가 탄 배는 근처에 나타난 미국 잠수함에게 어느 순간에 어뢰 공격을 받을 지 모를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배는 2천 톤 급의 작은 화물선인 데다가, 기름과 폭약 같은 것만 잔뜩 싣고 있어서 한 방 맞기만 하면 그 즉시로, 배도 사람도 한꺼번에 폭발해 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갑판 위에서 어느 한 순간에 닥칠 지도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나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 품에 안겨 죽고 싶은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평소에 내가 겉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인, 이와 같은 내 본심을 깨닫고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어머니 곁을 떠나 죽고 싶다는 것은 순전히 내가 만들어 낸 생각이고, 나의 본심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그때 얻은 것입니다.
나는 이 경험 말고도, 두서너 번 꿈 속에서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느끼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심적 반응을 일으키는 경험을 하고 난 뒤에는 나의 본심이라는 것, 즉 나의 마음속 깊이 있는 참된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 뒤로, 어머니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참으로 모항(母港)과 같은 분이요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 그 품을 떠나서는 내가 살아 있을 수도, 아니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언젠가, 어느 수련장에서 잠시 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엌에서 그릇 소리 나면 생각나는 거 없어요?"
참 이상합니다. 그릇 소리 날 때에는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나의 고향은 대구인데, 마음의 고향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어느 집이라고 지적할 수 없는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그 고향 말입니다.
팔자는 드세고, 성품은 곧고
내 마음에 새겨진 어머니의 영상은 늙은 모습입니다. 이마에 깊이 주름이 잡혀 있고, 칠십 년의 풍상을 겪은 모습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당신 자신은 비우고 또 비우신 분.……………… 그러나 위엄이 있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질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고 미소가 많아졌던 듯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고 초탈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모두 신부로 만들고 그 뜻을 다 이루었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들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 자와 '하늘 천 따지' 정도의 기초한문 정도와 한글밖에 아는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옹기 장수를 하던 아버지와 혼인하신 뒤로, 평생을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로 이사를 다니며, 옹기나 포목을 이고 그것을 파는 것으로 생활을 해야 했고 고생도 무던해야 했던 분이었습니다. 말띠였는데, 말띠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대로 팔자가 드셌다면 드셌다고 할 수 있는 한평생을 보낸 분이었습니다.
또 본디 성품이 곧은 분이었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한사코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어서 자식들 교육에도 그만큼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고, 그 때문에 형님과 나, 두 어린 형제를 더욱 엄하게 키웠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영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또 우리 형제는 어릴 때 거짓말은 물론이요, 욕 같은 상스러운 소리를 한 마디도 입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집은 참으로 가난하였습니다. 늘 초가삼간에서 살았고, 대구에서는 한 때 셋방살이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집은 언제나 깨끗이 도배한 방이었습니다. 군위의 시골 동네에 살 때에도 그러했는데, 그 무렵에 그 동네에서 도배한 방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우리보다 형편이 몇 갑절 나은 집도 벽에 도배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벽에 도배를, 적어도 한 해에 두 번씩 했고(봄 가을, 두 차례 시골 신자를 방문하러 오는 신부님을 우리집에 모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입은 옷도 깨끗한 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밥 또한 늘 잡곡이 좀 섞인 쌀밥이었습니다. 이것도 그 즈음의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 자식들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엿이나 과자 따위의 군것질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서는 떡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떡을 한 것은 나의 큰 조카(어머니의 첫 친손자)의 돌잔치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이처럼 남들이 흔히 해 먹는 떡조차 하지 않았으나, 끼니마다 먹는 음식만은 그 즈음의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일류 음식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그렇게 먹였을까' 하고 말입니다. 나는 뒤에 사람들한테서 부잣집 아들같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들처럼 전혀 궁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우리집 환경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궁해 보이지 않고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순전히 어머니가 자식을 그 가난 속에서도 귀하게 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어머니의 손은 참으로 '약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가 아플 때에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내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 아픈 것이 씻은 듯이 낫고, 체했을 때에 어머니가 바늘로 엄지 손가락 마디를 따서 맺힌 피를 흘리면, 체한 것이 곧바로 낫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큰 형님이 20대에 집을 나가 일본에 있다가 다리에 큰 화상을 입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형님을 데려와 집에서 조약(藥)으로 살린 일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에게는 어머니가 일본말을 한 마디도 모르면서 일본까지 혼자 가서, 주소 하나만을 들고 형님을 찾아 내어 기어이 데려온 것이 참으로 놀라웠고, 약으로써 3년 뒤에는 완치시켜 - 약간 절기는 했지만 - 자유로이 다닐 수 있게까지 하였으니, 어머니의 의술은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나는 그 때에,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자식의 병에 무슨 약이 좋은지 육감으로 아는 어떤 지혜를 지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스물다섯에 장가 갈 꺼야
어머니는 장에 가서 알록달록한 「효자전」을 사와 그걸 밤마다 읽어 주곤 했습니다. 그 효자전」에는, 옛날에 부모가 죽은 후에 3년을 무덤에서 지키고 있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혼자 결심했습니다.
군위읍을 지나다니다 보면, 일본 사람들의 점포는 좀 크고 깨끗한데,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그런 점포에 가서 한 5년 동안 배운다면 그럭저럭 열일곱 여덟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립해 가지고 스물댓까지 일하다가 스물다섯이 되면 장가를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를 해야겠다, 이렇게 혼자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꿈은 무너졌지만, 다른 약속은 지켜 드렸습니다. 그 때 어머니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서른 살이 되면, 인삼을 사서 달여 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랬는데, 어머니가 그걸 기억하셔서 내 나이 서른 살에 인삼을 사서 달여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는 울지 않았습니다. 불효자식이었던 것같습니다. 노환으로 조금씩 아프셨는데, 남의 셋방에서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고 늘 걱정했었습니다. 형편없는 집이었지만 다행히 집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어떤 의미로는 이젠 돌아가셔도 괜찮다 할 때 돌아가셔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토요일)'에 돌아가시길 원하셨는데 바로 그날 가셨고, 평소 죽음 준비를 잘 하셨지만 그날도 오후에 당신 방의 십자가를 가지고 집 가까이에 있던 성당에 가셔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다가 마침 성당에 신부님이 계셔서 성사도 보시고, 집에 오셔서 저녁도 다 드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 어머니 시신 앞에서, 다른 사람 몰래 혼자서 어머니 고생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젖어오는 것을 느끼긴 했습니다만, 어쩌면 남이 보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메마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눈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어떤 때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엉뚱하게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세상사는 이야기 /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中 어머니 손은 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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