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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한국의 대중가요사 본문

음악이야기/한국음악

한국의 대중가요사

김현관- 그루터기 2023. 6. 1. 07:39

대중가요

예술가곡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유행가라고도 한다. 예술가곡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대중가요는 감각적인 대중성 ·오락성 ·통속성 ·상업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술가곡을 제외한 가요 전반을 의미하나, 민요와는 구분된다. 한국에서의 대중가요는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된다. 즉 선교사들에 의하여 찬송가를 중심으로 한 서양음악이 들어오자(1885), 서양의 노래들이 번안되어 불리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학부(學部)에서 보통교육창가집을 발간하였는데, 거의가 1872년 일본에서 발간된 소학창가집의 곡들을 전재한 것들이었다. 이 시절 창가는 서양음악을 지칭하는 것이 통례로 인식되었다. 대중가요는 산업사회의 발달과 함께 매스컴의 급진적인 발달에 힘입어 지방적인 색채가 퇴색되면서 도시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특징이 생겼다. 그리고 노래의 발성 ·창법 ·리듬 ·음계 ·멜로디가 민감하게 변하고 장식음(꾸밈음)의 구사법이 변화무쌍하게 변천해도 그 나름대로 하나의 전통을 이어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1885년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종교사업과 교육사업(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을 시작하면서 찬송가의 보급과 더불어 창가(唱歌)’라는 신식 노래가 등장하였다. 창가의 어원은 운문형태의 문학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노래부르기를 말하는데, 초창기는 시형(詩型)이 다분히 일본의 것을 모방한 듯한 5 ·7 또는 7 ·5조 등의 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신시조의 유행시대였다. 한문문화권(중국 ·일본 ·한국)에서 통속적인 유행가를 대중가요라고 지칭하는 것은 한국뿐이다.

이 당시 한국에서는 예술적인 가곡도 가요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었다. 1909년 민족음악의 기치를 내세우고 국악과 양악을 가르치던 유일한 민간학원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의 후신인 조선정악전습소출신 이상준(李尙俊)조선속요집(朝鮮俗謠集)》 《신유행창가집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일본창가와 유행가가 여러 곡 실려 있었으며, 일반대중에게 유행소가(流行小歌)’라는 말이 익숙해진 것은 14년 이후이다. 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전시체제에 맞지 않는다 하여 종래의 퇴폐적인 유행가를 제한 ·금지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군가 ·애국가요 ·국민가요라는 명칭을 붙여 획일정책으로 몰고 갔을 때, 유행가는 보다 더 대중적인 노래라고 해서 대중가요라는 새로운 명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순수음악에서는 유행가와 구별하기 위해 예술가또는 예술가요라고 구분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가곡으로 통칭된다. 대중가요는 양악기로 반주하는 경음악 형식의 가곡이므로 더욱 구분을 확실하게 고집했던 것이다.

포크록이란

서양 팝음악의 본류는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미국 흑인의 블루스와 영국의 포크가 그것이다. 특히 블루스는 미국 백인들의 컨츄리에 음악적인 우월감을 갖고 흑인들의 사회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급속도로 뿌리내리면서 미국 팝 음악의 가장 영향력 높은 장르로 자리했고, 포크는 미국으로 건너가 50년대 미국 도시지역 노동자들의 메시지를 담으며 모던포크로 발전하여 또 다른 영향력을 심어주었다.

특히 포크는 다른 그 어떤 음악보다도 가사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소외받는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회적인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0년대 우디 거슬리라는 포크의 초창기 영웅은 미국의 신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아 포크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그후 밥딜런과 조엔 바에즈 등 뉴욕을 중심으로 한 모던 포크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60년대를 거치면서 밥딜런은 모던 포크에 과감히 일렉트릭 기타를 접목시켜 포크록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이후 등장하는 하드록의 모태이면서 블루스와 모던포크가 하나됨을 의미한 것이다. 포크록의 탄생으로 록은 포크의 저항성, 블루스의 감성을 모두 지니면서 20세기 최고의 장르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Rock 음악이란

Rock음악이란 Rocknroll 음악이 그 명칭이 축소되어 락(rock)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음악적으로 rock'n'roll은 미국 남부 흑인들의 독특한 대중음악 형태인 블루스에 강한 비트가 가미된 리듬 앤드 블루스(R&B)에다 미국 남서부의 카우보이·광부·농부 등 백인 육체노동자들의 통속적인 대중가요 컨트리뮤직이 적당히 뒤섞여 젊은이 취향에 맞게 만들어진 대중가요 형태입니다.

통속성·즉흥성에 관능적인 요소까지 가미된 초기 로큰롤은 음악적으로 거칠고 조악하게 느껴져 비난도 받았으나, 리듬 패턴이나 감각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발표된 pop music의 귀감이 되었고 차차 예술적 감각이 가미되어 좀더 세련된 음악형태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Rock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60년대 초라고 알려져 있고요, 이 무렵에는 초기 Rock'n'roll과는 표현양식이나 내용면에서 많이 세련되어 졌습니다.

Rock 뮤직은 Progressive rock, fork rock, art rock, hard rock, jazz rock등 다양하고 개성이 강한 하위장르를 많이 포함하고 있지요. Heavy Metal 음악을 Rock의 모든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Heavy Metal은 Hard Rock의 일종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1964년 영국의 4인조 그룹 Beatles가 미국에 진출, 《I Wanna Hold Your Hand》로 미국을 통해 전세계로 그들의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Rock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Rock'n'roll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로부터 rock'n'roll 이 시작되었다면 요즈음 이야기하는 록뮤직은 비틀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윽고 그것은 비틀스스타일을 모방한 데이브 클라크 파이브, 롤링스톤스, 맨프리트맨, 홀리스, 애니멀스 등 밴드 전성시대로 돌입한 것입니다.

초기 비틀스는 rock'n'roll 스타일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나, 점차 모방에서 벗어나 그들 특유의 음악 분위기를 창출, 독특한 비틀스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고, 이어 비틀스음악은 rock 뮤직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hard rock, 또는 heavy metal은 밥 딜런으로부터 유래한 rock의 폭발성을 극대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rock = hard rock, heavy metal의 공식을 생각하는 것은 rock의 특징적인 부분인 반항성과 폭발성을 극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미 헨드릭스를 거쳐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rock elite'의 시대가 열립니다.

rock의 폭발성을 무시하고, 듣기좋은, 팝적인 rock을 구사하는 폴 매카트니, 엘튼 존, 에릭 크랩튼, 예스 등의 밴드가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이러한 rock적이지 못한 rock음악에 반기를 들며 rock의 반항성을 찾아 나선 밴드들이 바로 heavy metal 밴드들입니다. 그리고 이 폭발성은 다시 그런지, 얼터너티브 rock을 통해 복원됩니다. 

그러나 rock을 정의할 때 가장 가치있게 생각되는 것은 그 특유의 저항성입니다. 

끊임없는 기성세대와 기성음악에게 대한 저항으로 rock은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포크락 - 사이키델릭 - 헤비메탈 - 펑크 - 얼터너티브로 이어지는 소위 말하는 rock의 주류를 볼 때 그것은 저항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rock의 원형을 blues 음악에서 찾는 것도 그 blues가 흑인들의 백인에 대한 저항에 그 원류를 두고 있는 것도 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답변하신 분들이 rock음악을 정의하며 기타-베이스-드럼 등을 이야기하셨는데, 이것은 스탠더드 팝과의 차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tandard Pop은 상부계층을 주요 소비자로 하는 음악입니다. 또한 Classic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Classic과 Jazz를 rock에 포함시킨 progressive rock을 정통 rock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rock 특유의 hungry한 정신과 저항의식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트의 넘버 원을 휩쓰는 rock음악들은 그 음악들이 시대와 타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rock음악의 저항성이 시대에 대한 저항의식과 교류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마무리로, 긴~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결론 : Rock음악은 저항성과 폭발성을 근거로 한 젊은이들의 음악이다.

한국의 락(rock)을 고민하다.

대중음악에는 메시지가 있는 음악이 필요하고 소중하다.

1.그런 음악들은 주로 언제 만들어졌나
80년대 중반 조용필이 있던 시대에 만들어 졌다.

1)안치환-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찾사’(-사계, 그 날이 오면)의 멤버였다. 댄스음악의 주류를 이루던 김완선. 박남정 시대에 ‘노찻사’ 앨범은80만장 판매되었는데 이는 대중음악의 사회적 측면이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음악은 서태지 와 아이들의 등장과 문민정부 출범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렇지만 안치환은 대중들 속에서 민중음악을 보여주기로 하고 대중가수로 변신해서 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2) 윤도현 밴드
2002년 월드컵 ‘오 필승코리아!’ 대중적인 가수로 상승하게 된다.
한국적 락을 하며, 락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밴드라는 평과 함께, 록 밴드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밴드이다.

2.안치환과 자유, 윤도현 밴드의 의미
-안치환과 윤도현 밴드는80년대 중요한 문화 유산인 음악의 사회성, 변화와 개혁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대중음악은 때로 사회적 메시지가 중요함을 일깨웠다.
-음반시장이 불황일 때 공연이 중요함을 가르쳐 주었다.
-락은 대중음악에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다양한 음악을 접하는 것이 대중음악을 사랑하고 지켜나가는 길이다

80년대 중후반 발라드의 전성기

-70년대 스탠다드 가요로부터 시작되는 발라드가요의 흐름 / 재즈 색체의 가요

 - 스탠다드 재즈 가요에서 시작한 성인 발라드가요

1960년대는 미8군 무대의 전성기였고 이곳을 통해 재즈, 팝, 컨트리 등 미국의 음악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재즈는 미군들에게 인기가 높아 당시 무대의 기본이었던 빅밴드들에게 카피의 우선 대상이었다. 이곳에서 재즈 실력을 쌓아갔던 이봉조, 길옥윤, 박춘석, 이동기 등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있는 이름들이다.

당시 실력만 있으면 큰무대와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명문대 출신들은 물론 음악대학 출신들이 주저 없이 미8군 무대에 올랐다. 재즈가 좋아 일본에까지 밀항했던 길옥윤이나 섹스폰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봉조 등이 점차 재즈 가수들을 위해 작곡하면서 스윙이나 스탠다드 재즈를 기본으로한 가요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정훈희, 패티김, 현미, 최희준 같은 대형 가수들이 나온다. 정훈희 '꽃밭에서', '파도'나 현미의 '밤안개',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등은 당시 대표적인 재즈가요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 가창력이 요구되는 가요제 스타일의 발라드 정착

70년대 정훈희가 '무인도'로 칠레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하여 한동안 관심이 집중되었다. 70년대말에는 MBC와 TBC가 경쟁적으로 국제 가요제를 개최하였다. 그러자 '무인도'를 모델로 하는 가창력과 대곡스타일의 노래들이 가요제를 목표로 작곡되었고 많은 곡들이 수상을 하였다.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곡은 한경애의 '곡예사의 첫사랑'과 윤복희의 '여러분' 등이다.

'무인도'를 비롯한 이런 곡들은 재즈적인 색체를 소멸시키면서 성인 발라드가요의 전형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러다가 79년 윤시내의 '열애'가 발표된다. 그전 가요제 곡들이 큰 히트 없이 인지도만을 가진 것이었다면 '열애'는 터질듯한 가창력과 팝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연주의 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은다. 가요제를 목표로 하지 않는 가요제 스타일의 '열애' 는 당시 성인가요 즉, 성인 발라드가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음악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인물(가수)에 대해 살펴보면 대중음악이 보인다.
인물에 대한 것이 바로 대중음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1. 각 시대마다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가 있게 마련이다.
90년대 - 서태지지와 아이들, 신해철, 김건모, 신승훈,
80년대 - 조용필
70년대 - 남진, 나훈아

2. 대중음악은 인물과 인물들간의 관계가 이끌어 왔다.
라이벌(경쟁자)가 있음을 해서 음악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3. 주도적인 인물이 있으면 경쟁하는 라이벌이 있으므로 해서 음악계가 풍요로워 지는 것이다. 라이벌 관계를 들여다보면 대중음악의 역사가 쉽게 이해된다.

4. 예전과 요즘의 음악계를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7,80년대 가수 뒤에는 매니져가 있었고, 사람들은 매니져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매니져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 이는 음악계가 대중과 친숙하다는 의미하는 반면에 가수의 탄생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스타메이킹 기획사들의 입김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기획사들에 의해 스타시스템과 라이벌이 만들어진다.

5. 라이벌전은 대중음악역사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라이벌전과 인물을 통해서 대중음악의 역사로 알면 된다..
70년대 - 남진과 나훈아
80년대 -조용필-전영록,이용,윤수일,김수철,구창모,이문세,임지훈,조하문,변진섭,김민우,신승훈

6. 음악은 어렵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느끼면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위로 받고 편안해지지 위해 듣는 것으로서 음악을 들어야 풍요로워진다

 오빠부대의 원조. 조용필을 듣다!

 * 조용필과 80년대 언더그라운드

-현재 한국음악이 해외로부터 호평 받는 밑거름은 80년대 조용필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필이 등장하면서 달라진 것은 당시 대중음악의 시장이 천 억 원대로 커졌다는 것이다.
-조용필의 힘은 음악에서 온다. 조용필 혼자서 소울, 블루스, 댄스 등 의 다양한 장르를 일인의 몸으로 소화했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으로’스타가 되었으며 대마초사건으로 80년대에 다시 등장한다.
-70년대 4장의 앨범과 90년대 초 2장의 베스트앨범을 포함해 공식앨범23장 170여 곡.
*단조 이지리스닝
-정(1집)돌아오지 않는 강(1집)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2집) 등
*단지 이지리스닝+록
-비련, (4집) 창 밖의 여자(1집).물망초(3집) 등
*동요 - 난 아니야(4집)
*가곡 - 친구요(5집) 등
*트롯트
-허공(8집),돌아와요 부산항에(1집)일편단심  민들레야(9집) 등
*민요 – 한 오 백 년
*락 – 못 찾겠다 꾀꼬리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스타일의 음악을 보여주었으며 장르를 통합했다고 할 수 있다.
-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가 되었고, 80년 봄에 ‘창 밖의 여자’로 다시 등장했는데
이는 80년대 신군부의 시작과 함께 조용필의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조용필의 노래는 신군부에 품고 있는 억눌린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었다.

-‘언더그라운드의 출현’
절대 강자인 조용필에 도전하는 경쟁자가 나왔다. -전영록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송골매 구창모의 ’희나리‘, 윤수일 ’아파트‘, 김수철 ’못다 핀 꽃 한송이‘, ’내일‘,’별리‘등
도전하는 경쟁 가수들이 등장한 것은 조용필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강한 ‘오버 그라운드’가 있어서 이에 반대되는 ‘언더그라운드’가수들이 등장하게 된다. 들국화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노래를 찾는 사람들, 시인과 촌장, 김현식 등..
‘오버그라운드가 막강할 때 언더그라운드가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막강한 슈퍼스타였던 조용필이 힘이 크다는 것이다. 

-80년대는 조용필과 조용필을 둘러싼 사람들의 경쟁관계로 인해서 풍요로웠다. 그리고 그 힘은 나아가 한류로까지 이어졌다. 최근세 우리 음악계의 기본은 80년대의 수퍼스타 조용필이었다.

댄스가요계의 핵 폭풍

A. 댄스음악
-대중음악 중에서 가장 대중 음악적인 것은 댄스 음악이다.
-대중음악은 노래와 춤의 접합이라 할 수 있다.
-90년대 음악의 약점은 댄스음악에 집중함으로 장르가 다양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대중음악은 춤(댄스)를 전제로 하고 있다.
-댄스음악을 천대시하는 것은 잘못된 관념이다.
-80년대에도 댄스음악이 강했으며, 90년대의 예고편이랄 수 있었다.

1. 김완선
-‘한국의 마돈나’라고 불리웠으며 비주얼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2. 박남정
-춤마다 차별화를 주기위해 포인트를 주는데 그 시작은 박남정의 춤이었다.
-‘마음은 박남정 몸은 000’이란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3. 소방차
-정원관. 이상원, 김태형,
-젊음의 분출욕구를 대신했다.
-소방차의 댄스가 90년대 댄스의 격렬한 흐름을 시사한다.

B. 댄스음악의 영향
-소방차, 김완선, 박남정의 의미는 10대들을 음반시장에 유입시킨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음반시장이 국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10대들(틴 에이저)이 소비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때가 아니라 80년대 후반이다.
-80년대 댄스음악이 있었기 때문에 장르가 풍요로웠고,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에 이르러 우리나라 음반시장이 5천 억 원 대가 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TV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면서 비주얼한 면이 중요하게 되었다.
(대중음악에서 가장 대중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섹슈얼리티인데(성적인 매력)인데 김완선의 경우 그 중요성을 보여줬다.)
C.80년대 댄스음악에 대한 정리
-80년대 댄스음악은 90년대 댄스음악 주도권을 예약한 시기였다.
-10시장이 열렸다.
-대중음악의 중요한 섹슈얼리티(비주얼)을 일깨워준 시기였다.

발라드의 힘 ; 이문세와 신승훈

1.팝송의 시대였던 70, 80년대
-요즘 신세대의 100%는 가요를 듣는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70, 80년대는 팝송의 시대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라디오 프로그램들도 팝송위주의 프로그램들이 대다수였다.

2.언제부터 팝송에서 가요의 시대로 진행이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점이 이문세 라고 말한다.
-이문세는 가수로서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라디오와 대중음악 두 분야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문세 부터 가요와 팝이 역전 되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요로 역전되기 전 전조현상은 있었다. 산울림과 조용필 등을 들 수 있다.
-‘산울림’-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락커라 할 수 있는 ‘김창완’ 이 등장하면서 77년 발매된 1집 ‘아니 벌써’는 이전의 가요들과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때부터 대중들이 서서히 가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김창완 자신이 팝송보다 나을 수 있는 가요를 만들 자신이 있어서 만든 앨범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조용필’-다양한 장르를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요를 듣기 시작 했다. LP로 50만장이 팔렸다.
-이 당시만 해도 가요프로그램이 거의 없었고 팝송프로그램뿐 이었는데 이문세가 등장하면서 방송국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때부터 가요프로그램이 많아졌다. 88년을 기점으로 가요의 시장규모와 흐름이 바뀌었는데 그러한 예비흐름이 있었기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3.이문세
-이문세의 등장하던 시기는 사회의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는데 그 시기가 이문세의 등장과 맞물려서 발라드가 꽃필 수 있었다.
-발라드가 강세가 되면서 많은 발라드 스타들이 나오게 되었다. 임지훈, 조하문 등
-수치상으로도 완벽한 밀리언셀러가 된 것은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 ’100만장 팔림.
-‘너에게로 또다시’ 89년 2집 100 만장 팔림
-변진섭에 와서 발라드가 시장을 주도하는 음악이 되었다.

4.신승훈
-90년 11월 슈퍼스타 ‘신승훈’이 출현한다.-발라드 시장의 결정타로 이야기 됨.
-만약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신승훈에 의해서 발라드시장이 좀 더 오랬을 것으로 음악 관계자들이 분석한다.
-‘보이지 않는 사랑’92년 - 100만장

 가요계의 변혁- 서태지와 hot

1. 서태지와 아이들
92년 봄에 ‘난 알아요. ’ 발표
‘대중음악 폭발현상’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얻음.
‘히스테리현상’을 일으켰다.-50년대 엘비스 60년대 비틀즈. 70년대 남진. 나훈아. 80년대 조용필, 결정타는 90년대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93년 ‘하여가’ 발표-서태지의 음악은 ‘랩 댄스’인데 서구에는 없는 말이다. ‘난 알아요’의 랩 부분이 한국말로는 처음으로 사용된 곡이다. 그 전에 나온 신해철의 ‘안녕’에 나온 랩은 영어였다.
80년대 역사적으로 중요한 락 밴드 ‘신화’의 멤버였다.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는 신화2기 멤버로 베이스를 담당했었다.) ‘난 알아요’는 처음에는 랩이고, 나중에는 락이다.
‘난 알아요, ’하여가‘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곳 중에서 기타 노이즈가 들어간 최초의 곡이다.
‘난 알아요’-‘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부분은 재래식 선율이다.
‘난 알아요’을 랩을 강력하게 한 것이 ‘하여가’이다. 강한 음색과 맞는 태평소 연주를 넣은 것이다. 날라리가 연주가 들어가면서 곡이 한국적인 음악으로 바뀌었다.
95년 ‘발해를 꿈꾸며’, ‘교실이데아’, ‘내맘이야’ ‘지킬박사와 하이드 – 락 성향이 강한 앨범발표
96년 1울 31일 (3)은퇴-해체
은퇴하고 3개월 후 hot 등장-‘전사의 후예’
얼마 후 ' 학원별곡‘ -서태지의 유산을 안고 가려는 느낌이 있었다.
97년에 등장한 가수들과 서태지와 아이들 당시의 가수들의 차이점이 있었다.
92-서태지 은퇴 이전 가수들 :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듀스, 마로니에. 임종환. 투투. 룰라,
95년 윤도현밴드, 강산애, 유희열. 김동률,
은퇴 후 - hot. 젝키, ses, 핑클
이전은 가수 자신이 곡을 썼다. 예술을 따졌다.
차별 점은-hot부터 10대들의 수요층이 단단해지면서 가수보다는 가수를 키워낸 기획사(프로덕션)가 중요해진 것이다.
가수보다는 기획사가 힘을 가진 산업화가 되었다.
중심이 음악 비지니스가 중요해졌다.
한류의 열풍을 이어가려면 예술적 가치의 중요성
96년과 92년의 차이점
90년대 말에 대한 반성으로 7080, 복고문화, 리메이크가 나오고 있다. 음악계에도 예술과 산업이라는 것이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이 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출생1959(경기도 부천)학력고려대학교 사회학수상2006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공로상경력영상물 등급위원회 공연심의위원 내외경제신문 기자 경향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