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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쌍화탕과 나 / 박 대인 본문
쌍화탕과 나 / 박 대인
知識 ,知慧 ,生活/배움-문학,철학사
쌍화탕과 나 / 박 대인
지난 겨울이었다. 한 제자와 함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날씨는 그렇게 차지 않았지만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어 금방 눈이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
체육 회관을 지나서 무교동 입구까지 왔을 때 그에게 쌍화탕을 마셔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는 내가 오랫동안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과 거의 비슷하게 되어 버린 나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쌍화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웃으며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좁은 계단을 조심스럽게 한참 올라가면 엷은 주황색 벽지를 바른 마치 시골 역전의 다방을 연상케 하는 작은 홀이 있다. 벽에는 옛사람들의 솜씨인 족자들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쌍화탕의 주성분과 몸에 미치는 좋은 점들을 자세히 기록한 액자가 걸려 있다. 그 곳엔 여러 사람들이 쌍화탕을 마시고 있었다. 대개가 나이를 좀 먹은 중년 이상이었다. 그들 중의 몇몇은 들어올 때부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시선 집중에는 아주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는 매우 불안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온몸에 부딪히는 시선을 느끼며 차를 주문했다.
차를 나르는 여자아이가 "쌍화탕 둘'이라는 나의 말에 놀라서 웃으며 돌아섰다.
내가 처음 쌍화탕을 알게 된 것은 삼사 년 전부터였다. 나에겐 선생님이자 아버지처럼 친절하신 분이 있다.
그분은 한약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나에게 쌍화탕을 소개해 주셨다. 처음 마셨을 때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호기심 그 이상을 느낄 수 없었지만, 거기에는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그 어떤 신비스러운 것이 있었다. 나는 그 후 여러 번 다시 마실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때마다 더 깊은 맛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는 내 성미였을 것이다.
그 후부터 쌍화탕의 맛을 알고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나로서는 퍽 귀중한 일로 간직되었다. 그 맛은 쓰지만 약간 달기도 하다. 구수하면서도 뒷맛은 매운 것도 같다. 여하튼 그 맛을 나는 너무 생생하게 느낀다. 마시려 할 때 확 풍겨오는 그 냄새는 내가 한국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어떤 한국사람 집 이층에 방을 빌린 적이 있다. 아래층 주인집에서는 자주 한약을 끓였다. 처음 보는 나에게는 무척 신기한 것이었다. 온 집안에 서서히 스며드는 그 냄새를 나는 알고 있었다. 어떤 때에는 사흘 동안이나 약을 끓였으므로 나는 그 냄새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집에서 왜 그렇게 자주 약을 먹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숯불 담은 풍로 위에서 부글부글 소리 내며 끓던, 약봉지로 위를 싸 봉한 약탕관의 모습, 하얀 창호지 덮개를 들썩거리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의 모습, 약탕관에서 꺼낸 약을 삼베보자기에 쏟아 놓고 하얀 사기그릇에 쪼르륵 쪼르륵 짜던 그 모습… 나는 그저 신기하게만 바라보곤 했다. 미국에 있을 때나 한국에 있을 때 여러 번 한국 사람에 대해서 느낀 일 중 하나는 아무리 미국 사회에서 오래 살고 또 높은 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일지라도 한약의 위력을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시골의 한약방이나 근처의 약방을 구경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약을 지을 때의 한의사들의 모습은 확실히 신비스럽다.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그 조용한 움직임이라든가 또 그의 몸 전체에서 풍겨오는 것은 마치 종교적인 고백을 받는 신부와도 같은 모습인 것이다. 그들은 깊은 경험과 지혜로 써 환자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하얀 옷을 입은 한의사나 그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쌍화탕을 쉽게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외국인 친구들에게 쌍화탕을 소개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중 몇몇은 나로 인해서 쌍화탕의 맛을 알게 되었다.
차를 나르는 아이가 입가에 함빡 웃음을 머금은 채 쌍화탕을 가지고 왔다. 하얀 사기그릇에 쑥 색깔의 받침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는 한 모금 마시는 것 같더니 더 이상 못 마시고 있었다. 사실 한국의 지금 젊은이들 중엔 이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나는 내가 외국인을 데리고 온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주위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잔뜩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데….’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1969 현대문학 8월호
포이트라스 박사 (한국명/박 대인)가 한국에 온 것은 기독교 선교사로서였다. 그가 수십 년 동안 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선교사로서의 직분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로서의 직분을 위해 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비중 못지않게 한국 문학창작과 문학작품의 번역에도 주력해왔다. 그는 영문으로 소설을 쓰고 시를 창작 발표하고 있으면서 문화·사회 비평을 겸한 에세이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까지 매우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또한 그는 한국 사람과 다름없는, 바로 한국사람 · 한국 시민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비평하고 반응하는 한국에 젖어버린 미국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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