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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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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사는이야기

공감 / 당신의 아픔은 곧 내 아픔

김현관- 그루터기 2023. 7. 17. 00:04

공감 / 당신의 아픔은 곧 내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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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당신의 아픔은 곧 내 아픔

오래 전 사극 <다모>가 인기를 끌었다. 내 눈가와 귓가에서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덤덤한 목소리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한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드라마를 들여다보던 시청자 중 상당수가 이 대목에서 탄성을 질렀다. 남자 주인공의 입술을 떠나 여자 주인공의 마음으로 들이닥친이 짧은 문장에 상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구구절절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공감이고 소통이 아닐까.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상대가 느끼는 아픔을 느끼고 또 상대의 입장과 시선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자세야말로 소통의 정수가 아닐는지….

공감은 한국인 특유의 '정情'과 유사한 감정의 무늬를 지닌다. 사실 '정'은 영어로 번역하기 모호한 단어다. 애정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 'affection'으로 표현하면 '정'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잘려나간 것 같고, '애착'이라는 뜻의 'attachment'로 바꾸면 어딘지 엇나간 느낌이 든다. 외국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맛깔스러운 정서가 배어 있는 까닭이다.

다만 공감과 동정은 결이 다른 감정이 아닐까 싶다. 10년 전쯤이다. 방송사 리포터가 자식과 떨어져 사는 어르신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어르신이 입을 열자 구슬픈 배경 음악이 흘렀다. 리포터는 인터뷰 도중 연신 "쯧쯧쯧'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이제 어쩌시려고요", "참불쌍하시네요" 등의 문장을 내던지며 안쓰럽게 바라봤다. 리포터의 말이 어르신에게 꽃으로 전해질 리 없었다. 어르신은 말을 멈추었다. 끝부분을 날카롭게 다듬은 언어의 창이 어르신의 자존심과 살아온 세월을 후벼 판 듯했다.

동정과 공감은 우리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맥락의 생성 과정을 거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감정이 마음속에 흐르는 것이 공감이라면, 남의 딱한 처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연민이 마음 한구석에 고이면 동정이라는 웅덩이가 된다.

웅덩이는 흐르지 않고 정체돼 있으며 깊지 않다. 동정도 매한가지다. 누군가를 가엽게 여기는 감정에는 자칫 본인의 형편이 상대방보다 낫다는 얄팍한 판단이 스며들 수 있다. 그럴 경우 동정은 상대의 아픔을 달래기는커녕 곪을 대로 곪은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 것밖에 안 된다.

공감은 연민이나 측은지심보다 '인'과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仁은 사람 인人에 두 이를 더해 만든 한자다. 여기에는 단순히 '마음 씀씀이가 야박하지 않고 인자하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는 마음가짐 혹은 그러한 행위까지 내포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는 '인'을 인간이 지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간주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관계 속에서 '인'을 실천하면서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의 반대는 '불인'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 동양 의학 서적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

“신체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타인과 정서적으로도 감정이 통하지 아니한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아픔과 속사정을 짐작하거나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전방위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악惡이 깃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체포해 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을 총괄한 책임자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의무를 준수했고 명령에 따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의 변명에는 죄의식은커녕 고민의 흔적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거악을 창안하는 것은 히틀러 같은 악인이지만, 거악과 손을 잡거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일갈했다."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아닙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있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 어느 서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을넘기다가 그녀의 주장이 지닌 무게가 너무 무거워책 모서리를 쥔 채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일까? 그녀가 거창한 단어를 문장 곳곳에 집어넣어서 자신의 주장을 부풀린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녀의 말처럼, 악은 인간의 내부에 잠입해 똬리를틀고 앉아 우리의 윤리적 고민과 성찰을 방해한다.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내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상황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제2, 제3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공감과 무공감, 사유와 무사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틈틈이 내면의 민낯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기주 <말의품격>에서